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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버려야 ‘에덴’ 보인다, 예수가 사람 낚으라 한 이유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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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동이 틀 즈음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이토록 삭막한 땅에 어떻게 이토록 큰 호수가 있을까.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은 다음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차가웠다. 느껴보고 싶었다. 2000년 전 예수도 맛보았을 호수의 숨을.

 예수는 이 주변을 걷다가 어부들을 만났다. 베드로(시몬)와 안드레였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복음 4장 19절)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 '고기 잡는 기적'.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했다. [중앙포토]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 '고기 잡는 기적'.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했다. [중앙포토]

그 말을 듣고 둘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17)예수는 왜 사람을 낚으라고 했을까

 호수 아래서 발바닥에 뭔가 밟혔다. 미끈한 게 돌멩이 같았다. 손으로 집었더니 조개였다. 유대인은 율법에 따라 조개를 먹지 않는다. 조개뿐만이 아니다. 새우와 오징어 등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수산물도 먹지 않는다. 육류도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의 고기만 먹는다. 그래서 쇠고기는 먹고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 유제품을 먹을 때도 엄격하다. 치즈와 버터, 우유 등 소에서 나오는 유제품은 쇠고기와 함께 먹을 수 없다.

갈릴리 호수 바닥에 널려 있는 조개들. 유대인은 율법상 조개를 먹지 않기 때문에 호수에는 조개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갈릴리 호수 바닥에 널려 있는 조개들. 유대인은 율법상 조개를 먹지 않기 때문에 호수에는 조개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아침에 숙소에 차려진 간단한 뷔페 식단도 그랬다.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는 있었지만 쇠고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단은 그 반대였다. 쇠고기는 있지만 우유나 치즈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유대인의 율법은 무려 613가지다.

 그래서일까. 호수 바닥에는 조개가 지천이었다. 조개껍질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무슨 뜻일까. ‘사람 낚는 어부(Fishers of men).’ 예수가 말한 ‘사람을 낚다’의 의미는 대체 뭘까.

 도식적으로 풀면 간단하다. 전도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해서, 교회 신자 수를 늘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게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 둘, 셋 세면서 ‘내가 전도한 숫자’에 열을 올린다. 훈장을 세듯이 말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정해진 숫자를 채우는 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예수의 메시지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을까.

 무릎에서 찰랑거리는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갈릴리 호수에 처음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는 누구였을까. 그건 예수였다. 예수야말로 사람 낚는 어부였다. 그럼 예수는 어떻게 고기를 잡았을까. 그의 그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서에는 ‘예수의 낚시법’이 비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장 4절) 그게 예수의 낚시법이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오병이어 교회에 새겨져 있는 조각. 예수는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오병이어 교회에 새겨져 있는 조각. 예수는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했다.

 겉으로만 보이는 예수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 안의 주인공은 ‘신의 속성’이다. 그 속성이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그렇다. 신의 속성은 지금도 거(居)한다. 차별 없이 내리는 햇볕처럼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우리 안에도, 그들 안에도 거한다.

 왜 그럴까. 하느님(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우주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신의 속성이 충만하다. 그 ‘하나’뿐이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하느님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오직 그분만 있으므로.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정말로 하나라면 예수가 굳이 사람들을 낚기 위해 낚시를 할 이유는 없다. 모두가 하나라면 굳이 그물을 던질 까닭도 없다. 그런데 예수는 그물을 던졌다. 왜 그랬을까.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는 달랐다. 그때는 하나였다. 하느님이 아담 안에 거했고, 아담이 하느님 안에 거했다. 둘의 속성은 하나였다. 그때는 간격이 없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으면서 틈이 생겼다. 아담은 더는 하느님 안에 거하지 않았다. 대신 ‘나’라는 에고 속에 거했다. 그때부터 아담은 ‘신의 눈’이 아니라 ‘에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라고 부른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라고 부른다.

 눈이 바뀌자 에덴동산도 사라졌다. ‘하느님 나라’가 사라졌다. 에덴동산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가 산 넘고 물 건너 거주지를 옮긴 게 아니다. ‘신의 속성’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아담은 에덴에서도 벗어났다.

 속성이 같으면 하나가 되고, 속성이 다르면 둘이 된다. 그게 추방이다. 그러니 에덴동산이 그 옛날 아프리카의 어디쯤이니, 아시아와 유럽의 어디쯤이니 하며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약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낙원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의 눈’을 잃어버렸으므로 더는 에덴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장 17절)

 그게 예수의 낚시다. ‘사람 낚는 어부’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나의 눈을 덮고 있는 ‘에고의 비늘’을 벗기고,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신의 눈’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니 전도를 많이 해서 신자 수를 늘리는 걸 ‘사람 낚는’ 것과 동일시하면 곤란하다. 예수의 뜻을 너무 얕게 해석하는 셈이다. 그보다는 자신을 향해 스스로 물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갈릴리의 어부였던 제자들은 생업인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제자들은 생업인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에게 낚였는가.

 나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나의 눈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눈인가.

〈18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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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사람들은 찾습니다.
에덴 동산이 있었던 역사적 위치를 말입니다.
혹자는 그게 아프리카의 어디쯤이라고 하고,
또 혹자는 그게 중동 지역의 어디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에덴 동산을
물리적 공간으로 생각합니다.
수천년, 수만년 전의 유적지처럼
에덴동산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으로는
에덴 동산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에덴 동산이 어떤 곳인가요.
신의 속성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이 인간을 지을 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담의 안에도, 하와의 안에도 신의 속성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아담의 속성과 하와의 속성과 에덴의 속성이 하나이니까요.
신의 속성으로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달라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에고의 속성’이 자라났습니다.
에고의 속성 때문에 신의 속성이 가려졌습니다.

이 순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셈입니다.
아담과 에덴, 하와와 에덴 사이에 틈이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가 없습니다.
아담ㆍ하와의 속성과 에덴의 속성도 똑같습니다.
이제는 섞일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속성이 달라졌으니까요.

저는 그 순간 이미 추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프리카의 어디쯤, 중동의 어디쯤에서
천년만년 살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에덴에서 추방을 당한 거니까요.

그러니 에덴 동산은 물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고학적 추적을 통해
에덴 동산의 유적을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건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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