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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깨우친 수월의 소박한 법문…“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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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닦는 건 별거 아녀. 마음을 모으는 거여.”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한국 불교는 초토화가 됐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선가(禪家)의 전통은 허물어졌습니다.

그런 암흑기에 한국 선불교를 다시 일으킨 이가 경허 선사입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경허의세 달’이라고 부릅니다.
수월(水月)과 혜월(慧月), 그리고 만공(滿空)입니다.

중국 옌지에 있는 수월정사에 모셔져 있는 수월 선사의 진영. [중앙포토]

중국 옌지에 있는 수월정사에 모셔져 있는 수월 선사의 진영. [중앙포토]

수월은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만공은 중간 지점인 예산 수덕사에서 법을 펼쳤습니다.

그중에서 맏상좌가 수월(1855~1928)입니다.
수월은 달 중에서도 ‘꽉 찬 달’로 통합니다.

그런데 남겨진 오도송(깨닫는 순간에 읊는 게송)도 없고,
열반송(입적할 때 읊는 게송)도 없습니다.
그다지 자료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월에게는 ‘그림자 없는 성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닙니다.

수월은 출가 전에 머슴이었습니다.
무식하고, 못생기고,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월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 들어가
머슴살이했습니다.

하루는 탁발승이 그의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습니다.
밤새 탁발승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수월은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가죽신을 던져주며 “신발이 다 떨어지면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수월은 일을 마친 밤,
들판에 나가 가죽신을 신고서 끝없이 벼포기를 걷어찼습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을 더 보내고서야
수월은 출가를 했습니다.
서산 천장암으로 경허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수월 선사의 스승이자 한국 선불교의 불씨를 되지핀 경허 선사의 진영(왼쪽). 오른쪽은 경허 선사로 보이는 사진이다. 진영과 똑닮았다. [중앙포토]

수월 선사의 스승이자 한국 선불교의 불씨를 되지핀 경허 선사의 진영(왼쪽). 오른쪽은 경허 선사로 보이는 사진이다. 진영과 똑닮았다. [중앙포토]

수월의 발자취를 좇아 중국 북간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북간도의 용정촌은 식민지 시절 동포의 애환이 서린 곳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용정촌 용정중학교(지금은 대성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지금도 교정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치르기 전에
용정촌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애환도 함께 흐르는 곳입니다.

수월 선사도 깨달음을 얻은 뒤
용정촌에서 8년 넘게 살았습니다.

용정촌에는 수월 선사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한때는 있었습니다.

수월은 옌지(延吉)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투먼(圖門)시 일광산(一光山)에 작은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 초막 뒤는 천 길 낭떠러지였습니다.
그 아래 두만강이 흘렀습니다.

일광산 범바위에서 내려다 본 두만강. 일제 강점기, 자유를 찾아 동포들은 두만강을 건넌 뒤 이 고개를 넘었다. [중앙포토]

일광산 범바위에서 내려다 본 두만강. 일제 강점기, 자유를 찾아 동포들은 두만강을 건넌 뒤 이 고개를 넘었다. [중앙포토]

일제 식민지 시절, 동포들은 두만강을 건넌 후에
그 고개를 넘어야만 했습니다.

수월은 늘 그 고개 정상에 손수 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누가 만들었다는 흔적도 없이 말입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수월 선사는 어떤 법문을 했을까요.
현재 남아 있는 수월의 법문은 딱 하나뿐입니다.

부상을 당한 독립군 연설단원이 수월의 초막에 머물 때,
수월 선사가 들려준 법담입니다.

거기서 수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 천 따 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쪄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하는 겨.”

이 법문을 들은 독립단원은
훗날 몽골에서 스님이 됐습니다.

북간도의 송정에서 내려다 본 용정촌 일대. 왼쪽에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중앙포토]

북간도의 송정에서 내려다 본 용정촌 일대. 왼쪽에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중앙포토]

수월은 왜 마음을 모으라고 했을까요.
그게 왜 도를 닦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저는 그게 바깥을 향하는 눈을
나의 내면으로 돌리는 일이라고 봅니다.

눈을 내 안으로 돌릴 때,
비로소 마음공부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효봉 스님은 조계종의 초대 종정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조선인 최초의 판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사형판결을 내린 후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서 승려가 됐습니다.
멀리 북간도까지 수월 선사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됐습니다.

그러니 남아 있는 수월 선사의 유일한 법문,
그 내용이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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