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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본 적도 없는 그곳…예수는 왜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나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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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산책로가 좋았다. 한 바퀴 도는 데만 63㎞다. 자전거를 빌리면 하루 코스다. 예수는 갈릴리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곳에는 어부들이 많았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에게로 모였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예수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았다.

예수가 말한 곳에서 그물을 내린 제자들은 그물 가득 물고기를 잡았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예수가 말한 곳에서 그물을 내린 제자들은 그물 가득 물고기를 잡았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18)예수는 왜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까

그 장소가 여기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배에 올라타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뒤 배를 설교단 삼아 가르침을 펼쳤다. (누가복음 5장 3절) 설교를 마쳤을 때 예수가 시몬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누가복음 5장 4절) 한글 성서에는 이렇게 번역돼 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을 영어로 직역한 성서는 더 구체적이다. “Back up into the depth, and lower your nets for a catch(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그리고 그물을 내려서 잡아라).”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예수는 왜 “깊은 곳으로 가라”라고 하지 않고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라고 했을까. ‘돌아오다’는 그리스어로 ‘epanago(에파나고)’이다. 그곳은 어디일까. 혹시 우리는 한때 그곳에 머문 적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예수는 “다시 돌아오라”라고 한 것일까.

예수는 우리 내면에 있는 깊은 바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갈릴리 호수에 석양이 지고 있다.

예수는 우리 내면에 있는 깊은 바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갈릴리 호수에 석양이 지고 있다.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들자 푸른 호수와 푸른 하늘, 푸른 바람에 가슴이 탁 트였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어디쯤으로 배를 옮기라고 했을까. 성서에는 배를 옮겨 그물을 내렸더니 물고기가 한가득 잡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럼 예수는 단지 고기가 잡히는 지점을 알려준 걸까. 그뿐일까.

그리스어 성서에서 ‘깊은 곳’에 해당하는 단어는 ‘바소스(Bathos, βαθοζ)’다.  ‘바소스’에는 ‘깊은’, ‘심오한’, ‘무진장’ 등의 뜻이 있다. 다시 말해 ‘바탕없는 바탕’이다.  그런 심연을 가리킨다.

그럼 예수는 왜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다시 돌아오라”라고 한 걸까. 그리고 거기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까.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대체 어디일까.
나는 호숫가 언덕의 풀밭에 앉았다. 세상 모든 것에는 바닥이 있다. 끝이 있다. 다시 말해 유효기간이 있다. 길바닥의 돌도, 거리의 나무도, 하늘의 해도, 밤이 되면 솟는 달도, 인간의 육신도 다 유효기간이 있다.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바닥이 없는 건 대체 뭘까.

예수는 갈릴리 호수일대를 돌며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쉬운 말로 전했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일대를 돌며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쉬운 말로 전했다.

“깊은 곳으로 가라”라는 예수의 말을 듣고 베드로가 답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누가복음 5장 5절)

그렇다. 우리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린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그물을 내린다. 돈을 건지고, 명예를 건지고, 권력을 건지려 한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그런데 그 모든 물고기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결국 소멸하고 만다. 그러니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밤새도록 그물을 올려도 허전할 뿐이다. 베드로의 말처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된다.

불교에서는 그런 물고기를 ‘색(色, 물질과 감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색을 붙들지 마라”라고 한다. 모든 물고기는 사라지는 법이므로. 그래도 우리는 ‘색’을 움켜쥐고 그게 전부라고 여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놈의 물고기(색)는 잡으면 사라지고, 잡으면 사라지고, 잡으면 또 사라진다.

갈릴리 일대의 옛날 모습이다. 예수 당시에 갈릴리 호수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중앙포토]

갈릴리 일대의 옛날 모습이다. 예수 당시에 갈릴리 호수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중앙포토]

그럴수록 우리는 더 세게 거머쥔다. 물고기가 사라지면 다른 물고기를 찾고, 사라지면 또 다른 물고기를 찾는다. 결과는 똑같다. 결국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다. 대신 ‘사라지는 물고기’의 정체를 뚫으면 달라진다. 공(空)이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다. 이 우주의 바탕인 공이다. 거기에는 소멸이 없다.

예수가 돌아오라고 한 깊은 곳, 바닥이 없는 심연. 거기는 어디일까. 이 우주를 통틀어 바닥이 없는 곳은 딱 하나다. ‘없이 계신 하느님(하나님).’ 그분에게는 바닥이 없다.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예수는 “거기로 가라”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로 다시 돌아오라”라고 했다. 왜 그럴까. 우리가 본래 거기서 왔기 때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설했다. 그걸 찾기 위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예수는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설했다. 그걸 찾기 위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아들이다. 하느님이 코로 ‘신의 속성’을 불어넣은 아담의 자식이다. 아담에게 신의 속성이 있었듯이, 우리 안에도 신의 속성이 있다. 선악과로 인해 그게 잠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잠자는 심연으로, 신의 속성으로, 그 깊디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라고 했다.

〈19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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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예수님은 ‘내 안의 심연’을 말했습니다.
거기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깊은 바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그물을 내려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어떡하면 내 안의 깊은 바다를 향해서 그물을 던질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담긴 책에는 ‘경(經)’자가 붙습니다.
성경(聖經)도 그렇습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가 담겨 있기에  ‘경(經)’자가 붙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수도(修道)의 전통이 있습니다.
경전에 담긴 진리를 펼쳐놓고,
내 안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기만 한다고,
깊은 바다 속으로 내가 내려가진 않습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궁리(窮理)를 해야 합니다.

경전에 담긴 뜻이 뭔가,
자신에게 깊~이 물음을 던지고,
이치를 따지면서 궁리하고,
그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바퀴를 굴리고,
이걸 통해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이게 묵상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내려오는
수도의 전통입니다.

이 과정이 생략되면
내 안의 깊은 바다로 내려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물론 그물을 던지기도 어려워집니다.

혹시라도 우리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믿음의 슬로건만 내세우며
이 과정을 생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내가 해야 할 몫을 빠트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내 안의 깊은 바다를 건너뛰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내 안의 심연으로 내려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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