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한줄명상]100% 행복도, 100% 불행도 없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2021.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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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

#풍경1

 틱 낫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 산에 오를 때나, 아니면 길을 갈 때도 그렇습니다. 힘들어서 앞만 보고 갈 때는 주위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어떤 나무가 서 있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가는 내내 쉬지 않고 울어댄 새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소리가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틱 낫한 스님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지금 여기, 당신 앞에 서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

틱 낫한 스님은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틱 낫한 스님은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행복한 순간을 찾으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행복을 찾습니까. 많은 사람이 ‘100% 순도의 행복’을 찾습니다. 그야말로 행복의 분자들로만 가득 차서, 다른 불순물이 조금도 끼어들 수 없는 100% 행복한 순간을 찾습니다. 그래야만 내가 행복의 순간에, 행복감으로 가득 차서, 행복해지리라 기대합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행복을 설정하고, 행복을 기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어떤 문제냐고요? 이런 행복은 ‘파랑새’가 되기 쉽습니다. 동화 속의 파랑새는 어떻습니까. 찾아야 하는데, 끝내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쉼없이 좇지만 끝내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만약 행복이 그런 것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목이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파랑새를 좇아서 달려만 갈 뿐, 끝내 파랑새를 손에 쥐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틱 낫한 스님은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콕 집어서 가리켰습니다. 거기서 파랑새를 찾으라고 말입니다.

#풍경2

사람들은 “내 앞에 있는 아름다움이 뭔가?”라고 되묻습니다. “지금 내 삶은 힘들기만 해. 일도 마음대로 안 되고, 마음은 짜증만 나. 힘들어 죽겠어. 그런데 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야? 내 앞에는 아름다움이 없다고!” 이렇게 반박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땅바닥만 보고 산을 올라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힘겨운 오르막길 옆에도 들꽃은 피어 있고, 바위 투성이의 험로에서도 시원한 산바람이 붑니다. 그게 뭘까요.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아무리 행복한 순간에도 눈물이 있고, 아무리 불행한 순간에도 웃음이 있다. [중앙포토]

아무리 행복한 순간에도 눈물이 있고, 아무리 불행한 순간에도 웃음이 있다. [중앙포토]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행복의 순간에는 100% 행복만 있고, 고통의 순간에는 100% 고통만 있다. 슬픔의 순간에는 100% 슬픔만 있고, 외로움의 순간에는 100% 외로움만 있다. 한 마디로 ‘도 아니면 모’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정말 그런가요?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상갓집에 가면 울음소리만 가득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상객들의 대화 속에서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엄청나게 큰 상을 받는 수상자들이 웃기만 할까요. 수상 소감을 말할 때 흐느끼는 이들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행복의 순간에도 힘들게 고생한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의 행복이나 불행은 ‘도 아니면 모’가 아닙니다. 도 안에도 모가 있고, 모 안에도 도가 있습니다.

#풍경3

여기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틱 낫한 스님은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만나라”가 아니라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고 말했습니다. 왜 하필 “깊이 만나라”고 했을까요. 거기에는 또 어떤 코드가 숨어있는 걸까요.

중국의 운문 선사는 당시 임제종과 쌍벽을 이루었던 운문종의 종조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란 선구로도 유명한 선지식입니다. 하루는 어떤 학인이 운문 선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이 물음을 듣고 운문 선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부처가 왜 똥막대기인가. 아무리 공경하고 받들어도 모자랄 부처님을 왜 하필 똥막대기에 비유했을까. 이건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틱 낫한 스님(맨오른쪽)이 한국을 찾았을 때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서옹 스님(맨왼쪽)을 만나고 있다. [중앙포토]

틱 낫한 스님(맨오른쪽)이 한국을 찾았을 때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서옹 스님(맨왼쪽)을 만나고 있다. [중앙포토]

똥막대기는 냄새 나고 지저분한 물건입니다. 이에 반해 금막대기는 어떻습니까. 반짝이고, 아름답고, 비싸고, 귀한 물건입니다. 그럼 “부처는 금막대기다”라고 하면 어떨까요. 금막대기는 그럴싸하게 들리고, 똥막대기는 못마땅하게 들리나요. 그런데 선가(禪家)의 안목으로 보면 둘 다 그냥 덩어리입니다. 손으로 만져지는 물건(色)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깊이 들여다보세요. 거기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의 정체가 뭘까요. 다름 아닌 ‘공(空)’입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추하고, 못나고, 지저분해도 똑같습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잘나고, 예쁘고, 귀해도 똑같습니다. 속은 하나같이 ‘공(空)’입니다. 그래서 틱 낫한 스님은 “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고 말한 겁니다.

#풍경4

사람들은 또 묻습니다. “공(空)이 왜 아름다운가?” 세상의 꽃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꽃들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맙니다. 며칠 지나면 시들고 마는 존재입니다. 반면 똥막대기 안에, 금막대기 안에 깃들어 있는 ‘내면의 꽃’은 다릅니다. 시간이 흘러도, 공간이 바뀌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지지 않는 꽃입니다. 자연 속에, 세상 속에, 사람 속에 영원히 피어 있는 꽃입니다. 그러니 ‘공화(空花)’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겠지요.

누구나의 일상, 모든 삶의 순간에 꽃은 이미 피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걸 보는 일이다. [중앙포토]

누구나의 일상, 모든 삶의 순간에 꽃은 이미 피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걸 보는 일이다. [중앙포토]

우리가 행복할 때도, 우리가 불행할 때도 그 꽃은 피어 있습니다. 우리가 슬플 때도, 우리가 아플 때도 그 꽃은 피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늘 그런 아름다움이 피어 있습니다. 숨 가쁘게 산을 오른다고, 숨 가쁘게 살아간다고, 숨 가쁘게 헤쳐간다고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틱 낫한 스님이 말합니다.

“지금 네 앞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깊이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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