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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2+4」 대변혁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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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일 수교 북의 계산/「두개의 조선」론 포기여부 더 두고봐야/소ㆍ중 변하자 일본카드 꺼내
북한이 27일 일 자민ㆍ사회당 방북단에 불쑥 내민 「일본ㆍ북한간 국교정상화 교섭제안」은 종래 그들이 견지해온 대외기본정책(「2개 조선」 반대,유엔 동시가입 반대,연방제 통일)을 1백80도 전환시키는 카드라는 점에서 매우 뜻밖이다.
북한의 이날 제안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는 앞으로 북한측 자세를 좀더 지켜보아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ㆍ일ㆍ중ㆍ소의 4각 기본구도에 「탈냉전」을 실감케 하는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필요로 한다.
북한은 이번 일 방북단과의 회담을 당초 일본측이 의도한 단순한 「인질석방」(후지산호 문제)을 위한 관계개선의 장으로 보기보다 「소ㆍ북한의 대립」으로까지 심화된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국을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역사적 무대」로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날 국교정상화 제안은 김일성 주석이 27일 아침 가네마루와의 단독회담에서 직접 전달한 것으로 나타나 이같은 심증을 뒷받침한다.
김일성 주석은 이날 묘향산에서 가네마루와 가진 비밀회담에서 일본 언론기관의 평양지국 개설 요청에 대해 『국교가 이루어지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가네마루가 전해 김 주석 자신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개시를 시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이 이 시점에서 이처럼 일본에 대한 정부차원의 문호개방을 국제적으로 선언한 배경으로는 무엇보다도 「고립탈피」의 불가피성을 들 수 있다.
일 외무성의 한 소식통은 『한소 국교수립을 목전에 두고 한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술적 전환』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한소간의 접근 움직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온 북한은 급기야 최근 평양에서 있었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과의 소ㆍ북한외무장관회담 비망록을 공개,한반도 분단책임은 소련에 있으며 한소 국교수립은 「2개의 조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여 통일을 방해하는 행위라고까지 맹비난을 퍼부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소간은 30일 유엔총회 자리를 빌려 국교수립을 정식선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다 유일한 맹방인 중국까지도 그 방향으로 가리라는 판단이 서자 서둘러 「대일 수교제의」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측의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주장에 대해 견제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어온 중국이 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한국과 영사관계 수립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져 북한의 초조감을 증가시키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북한의 대일 수교제의는 또 일본이 동아시아ㆍ태평양지역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것을 은근히 불안해 하는 소련과 중국에 충격을 주기 위해 일본카드를 이용한 「쇼크요법」이라는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
김일성의 수교제의는 방북단을 이끈 가네마루 전 부총리의 방문성과를 극대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일 외무성의 대북 신중입장에 쐐기를 가하는 효과를 갖는다. 일 외무성은 가네마루와 대조적 자세를 표명,대북 배상문제 등은 국교정상화 교섭과정에서 얘기될 문제라고 지적해왔다. 김일성 제의는 따라서 배상문제ㆍ연락사무소 설치문제를 일본이 좀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효과를 갖는다.
이와 관련,대표단 회견에 동석한 자민당 이시이(석정일) 사무총장이 『국교정상화의 의도가 북한에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배상 등 경제협력에도 큰 차이를 준다.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는 한 그 범위는 좁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북한의 제안 배경에는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가 크게 작용했음을 시사,주목된다.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도 제안의 배경 설명중에 『일본정부의 일부에 국교수립 전에는 배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고 지적,국교수립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국제적 체면」과 「돈」 때문에 그동안 45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의 전후 처리문제와 국교수립을 한꺼번에 해결하자는 궁여지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된 셈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일본정부의 대응자세다. 일본이 지난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협정에 명시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한국뿐』이라는 조항에 대한 해석여부가 앞으로 한일간 외교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남북대화를 촉진시키는 방향에서 일ㆍ북한 관계개선을 인정한다』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살려주느냐는 것도 큰 문제로 남는다.<동경=방인철 특파원>
◎북­일 밀착 정부 대응/남북대화에 역풍 불까 우려/예상밖 과속… 일 정부태도에 추측 무성
북한ㆍ일본의 예상외로 발빠른 관계개선 움직임에 우리 정부가 긴장하는 반응을 보였다. 야나기 겐이치(유건일) 주한 일 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가네마루 전 부총리의 방북활동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정부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본측이 진의를 해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우선 가네마루 방북에 앞서 관계정상화 이전에 북한과의 경협,배상은 있을 수 없다고 우리 정부에 설명해온 일본정부의 입장에 아직도 변함이 없느냐는 점이다.
일측은 그간 『정치인 가네마루의 발언에 약간의 과속(?)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일 정부의 입장이 아니라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니 양해해달라』는 식으로 얘기해왔다.
그러나 가네마루가 「정치적 결단」으로 「경협과 배상문제」를 「관계정상화 교섭과 분리」시키고 이에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한 발언은 단순히 「협상용」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일본내 정치적 비중으로 볼 때 일본정부의 사전설명은 겉과 속이 다른 일본 외교의 속성을 다시한번 보인 것이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자민당과 노동당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그같은 창구를 통해 양국의 문제를 해결해나가자고 합의한 점은 가네마루의 발언을 일본정부의 설명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또 정부내에는 북한이 일본에 수교를 제의했다는 보도에 대해 수교 문제와 경협을 분리하려는 일본이 한국측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거나 북한이 일본의 그같은 입장을 봐주기 위해 짜고 하는 말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왜냐하면 한소,한중 접근으로 북한이 급하긴 하지만 「두개의 조선 반대」 논리를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일본과 북한의 수교와 경협 및 배상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일ㆍ북한 수교는 우리의 7ㆍ7선언에도 부합되고 북의 개방에도 기여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한중 관계개선의 속도에 맞춰 남북한 교차승인이 이루어지게 하고 북한이 핵안전협정에 가입하도록 하는 데 있어 일본이 우리 정부의 입장을 덜 배려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 섭섭할 뿐이다.
우리측이 두번째로 제기한 문제는 북한에 대한 「과잉우대」에 숨어 있는 일측의 저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일의 국교정상화 교섭은 14년이 걸렸고 경협과 사죄 등은 더 오랜기간 어렵게 단계적으로 해결돼왔던 터다.
우리에게 해왔던 까다로운 교섭과정과 태도를 버리고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마치 일괄타결이라도 하듯이 바쁘게 서두르는 것은 꼭 선의로만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정부는 중ㆍ소로부터의 외교적 고립과 어려운 경제사정이 북한으로 하여금 모처럼 남북대화에 임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일본이 우리를 도와주기를 은근히 기대해왔다. 이를테면 일ㆍ북한 관계정상화 속도에 한국쪽 입장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겠느냐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가네마루가 추진하는 대로 일본이 대북 경협과 수교의 보따리를 풀면 필시 남북대화의 진전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이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더욱이 북한ㆍ일의 급작스런 관계개선 움직임에는 경제ㆍ외교적 곤경에 빠진 북한의 적극적인 자세탓도 있지만 일본의 약삭빠른 계산이 더 짙게 작용했다고 보는 의심의 시각이 있다.
일본은 동유럽에 이은 동북아의 탈냉전시대를 맞아 경제력에 걸맞은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다는 의도를 자주 드러냈다.
경제력에 비해 외교적으로는 지진아라는 자책에서 출발,일본은 지금 캄보디아 평화화의를 동경으로 끌어들이고 유엔에서 아태 외무장관 만찬을 주최하는 등 정치대국의 꿈을 키우고 있다.
따라서 이번의 대북 협조도 그같은 일본의 외교적 목표아래 미ㆍ소ㆍ중에 못지 않은 한반도에의 영향력 확대를 노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우리는 기술이전,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개선 등 일본에 요구하는 현안을 갖고 있고 일본 역시 5조7천억원 규모의 고속전철을 한국에 팔기 위해 프랑스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이런 문제의 흥정에 북한카드가 활용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일본에 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일ㆍ북한 관계개선 자제가 아니라 일본이 남북한 문제,우리의 북방정책 등에 훼방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정치적 쐐기를 박자는 의도가 더 큰 것 같다.<이재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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