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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홍수〃|죽음·상실 뛰어넘는 신생의 상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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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25년 을축 대홍수 이후 65년만의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중부지방을 휩쓸고 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높고 푸르러 추석을 향한 가을로 깊숙히 들어가고 있다. 허나 그 수마의 흔적은 남아 민·관·군이 복구작업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도 민심은 천재냐, 인재냐로 잘잘못 따지기에 분주하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고향은 있어도 흙 한줌 없는/아-이 나라는 언제나 남의 땅 같구나/물구덩이 속에서 피눈물을 뿌려도/은신할 처마와/몸가릴 옷가지 하나 없어도//왕궁 안 오만한 주인의 수라상 위엔/진수성찬이 향기로와도/우리에겐 비에 젖은 주먹밥 뿐이다./공손히 뭉쳐 나누어 주는 손/흰옷일망정 덮어주는 손들만이/비와 눈물에 젖은 마음을 어루만지는구나.//보라 이비가 멎은 다음날엔/진정 폭풍우 같은 우리의 아우성이/새로운 장마를 마련할것이다.』(유진오의 『장마』중)
삶과 죽음, 그리고 부정을 씻고 다시 태어나는 신생의 원형적 상징성을 띠고있는 홍수는 구약성서「노아의 방주」이래 그 상징성과 처절한 상황으로 인해 문학 속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우리의 근·현대문학사에서 홍수를 다룬 작품으로 우선 대홍수가 난 1925년 발표된 최서해의 단편 『큰물진 뒤』를 들수 있다.
홍수로 마을방죽이 터져 갓난 아들과 전재산을 잃은 주인공은 읍내로 나와 초막을 짓고 날품팔이를 하며 연명한다. 그러나 공사판에서 갖은 욕설과 함께 심한 매를 맞고 쫓겨난 주인공은 장마 중 산후조리를 못해 죽어 가는 아내 곁에 누워 생각한다.『집을 바치고 힘을 바치고 귀중한 피까지 바치면서 남은 것은 풀막과 병·굶주림 ·모욕밖에 없다.
욕심 많고 우락부락하고 못된 짓 잘하는 무리들은 잘입고 잘먹고 잘산다』며 자신과 아내의 실낱같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밤중 부잣집을 강탈하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1930년에 발표된 이기영의 단편 『홍수』에서는 홍수가 뿔뿔이 지주 밑에 들어가 우직하게 일하던 농민들을 단결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강이 범람,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강변마을 주민들은 마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단결된 힘의 위력을 알게된다.
그들은 그 단결력으로 농토가 침수됐으니 소작료를 못 주겠다고 지주를 상대로 소작쟁의를 벌이며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좀더 체계적인 사업을 벌이기 위해 농민조합을 결성하기에까지 이른다.
1934년 발표된 박화성의 『홍수전후』는 호되게 홍수를 겪고 난 한 농민의 의식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의 영산강 범람을 집 기둥에 매단 배에 가족을 태워 잘 견뎌낸 송 서방은 그해 홍수 때도 『하늘이 알아서 하는 일이니』하며 집을 지키며 버티려다 어린 딸을 물에 떠내려 버리고 만다. 모든 일을 팔자소관으로만 알던 송 서방은 딸과 집과 곡식과 가축을 잃어버린 대 신 운명론적 사고에서 적극적 사고로 돌아서 힘차게 수재민 대책회의에 가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현기영씨가 85년에 발표한 단편 『난민일기』는 84년 홍수로 인한 망원동 침수를 다루고 있다. 현씨는 자신의 체험에 기초, 중산층 주거지역인 망원동을 침수시킨 원인과 주민들의 반응을 르포형식으로 보여주면서 이것이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드러낸다. 나아가 현씨는 이것이 인재임을 알고 개인적으로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당국에 떳떳이 의사표시를 못하는 주눅든 수재민들을 통해 중산층의 소시민적 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시쪽에서는 유진오가 수해구제를 위해 1946년 발표한 위 시 『장마』와 같은 행사시를 제외하고는 비·홍수는 일상의 변화 내지 죽음을 통한 신생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비는 무적함대./나는 그 사령관인양 바다를 호령하여,/승리를 위하여 만전을 다한다.//실지로는 우산을 받치고 길을 가지마는,/옆가의 건물들이 군함으로 보이고,/제독은 외로이 세상을 감시한다.//가로수들이 마스트로 보이고,/그 잎잎들이 신호기이니,/천하만사가 하느님 섭리대로 나부낀다.』(『비 10』전문)
삶이 구차한 듯 평생 방탕·주벽·구걸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시를 지키고있는 천상병씨에게 비는 그를 소외시킨 도시를 함대로, 그를 사령관으로 둔갑시키며 아연 살맛을 갖게 해준다.
『홍수가 나서/홍수가 나서/쓸려가 버리면 좋겠어/내 집 헌 구들장들/기울어진 벽들//‥‥//그래, 어디서 홍수가 나서/산골짝 흙탕물이/들판을 넘실대는 황톳물이/내 핏물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음 좋겠어/내 더러운/내 지긋지긋한/내 메스꺼운/시간들 쓸어갔음 좋겠어.』(『홍수』중)
이상호씨는 자신의 부정한 것들을 모두 쓸어버려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고 싶음을 홍수에 기대어 바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문학 속의 홍수는 개인이든 사회든 죄악과 상실·죽음을 씻고 극복하며 새롭게 다시 태어남을 지향하고 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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