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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한민족 한나라 깃발을 향해(북경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시안게임 개막식을 보고…
제11회 아시안 게임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가 드디어 높이 울렸다.
나의 육신은 격랑에 흔들리는 낡은 통통배처럼 떨렸다. 가슴의 밑바닥에서부터 견딜 수 없는 설움과 기쁨이 뒤섞인채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격정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북경 공인체육장을 가득 메운 관중 가운데 한민족이라면,특히 조국을 떠나온지 오래된 나와 같은 처지라면 이번 대회를 맞는 감회는 유별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시아 35개국(?)의 건아들이 차례차례 행진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운명과 같이 다가올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한,북한,그리고 조국을­.
북경의 가을은 천고마비라는 말 그대로 높고 푸른 하늘을 자랑한다.
올려다보기에 눈부신 지상 1천2백m의 고공에서 각국의 깃발을 단 낙하산들이 하나씩 내려왔다.
북경의 하늘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태극기와 인공기. 한 민족에 두개의 국기가 한자리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동족상잔의 뼈아픈 시기가 이미 지나갔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백의민족은 언제까지 이 지구촌에서 냉전체제의 유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일제식민지 36년,이 보다 더 긴 분단 45년,이제 10여년이 지나면 민족수난의 시기가 1백년을 채우게 된다.
한백년. 해외동포라는 이름의 나는 가슴 아프다. 베를린의 콘크리트 장벽은 아침햇살에 스러지는 악몽처럼 그렇게 물러가지 않았던가. 단일 민족이 단일팀으로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새 눈을 감은채 나의 상념은 주마등처럼 달리고 있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임을 자랑하셨다던 나의 증조부는 일제의 침탈아래 초근목피로 연명하다못해 살기좋다는 동북으로 옮겼다. 고향을 등지고 쪽박차고 남부여대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소영자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농민의 아들인 나는 말로만 전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야생화처럼 자랐다.
그리고 53년 국비생으로 연변대학을 마치고 북경대의 교수로 배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나의 눈앞에 나타난 분단이란 이름의 두개의 조국을 나는 깊은 상처와 같은 아픔과 그 긴 기다림끝의 반가움으로 몸살나게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다.
공인체육장의 넓은 필드에 매스게임이 펼쳐졌다. 투명한 가을의 미풍속에 연밭이 나타나고 선학이 춤을 춘다. 장내가 선율로 차오르면서 희디흰 선학이 춤을 춘다. 사랑으로 넘치는 미래에로 전아시아인민과 전세계인민이 한 지구촌에서 화목하게 살 것을 희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그속에서도 남북한이 하루빨리 하나로 되기를 두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이미 북한과 남한을 가보았다. 휴전선도 보았다. 북의 판문점쪽에는 남으로 가는 철길이 녹슬어 있었다. 남쪽의 38선상에는 북으로 가던 철마가 잔해로 남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군사분계선에만 철길이 없었을 뿐이었다.
언제 여기에 철길이 이어져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될까. 그때의 기차는 또 얼마나 벅찬 가슴으로 대지를 달려갈 것인가.
나는 남한의 건아,북한의 건아들이 보무당당하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래 스며 흐르던 눈물을 차츰 어깨를 떨면서 옆사람이 보는 것도 아랑곳 없이 쏟았다. 눈물을 실컷 흘리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진정되었다.
나는 북한에 9개월간 체류하면서 세계의 명산 금강산을 가보았다. 조물주가 재주를 다한 만물상,장엄하고도 단정한 구룡폭포,허공에서 구슬을 흩뿌리는 연주담,그리고 삼일포의 은은한 물굽이.
나의 순례는 명사십리 해당화피는 송도원,실버들이 흐느적거리는 능나도,대동강 부벽루를 태울 듯한 저녁놀로 이어졌다. 이 모두는 한 겨레인 남쪽의 동포들이 지금으로서는 가볼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다시 남쪽으로 가보았다. 한강은 대동강과 같은 쪽빛이었다. 뱃길로 22개의 웅장한 한강다리를 헤어보면서 『노들강변』이 저절로 마음에서 울려나왔다. 남북한을 여행하면서 우리민족의 목마른 염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번 대회에서 남북한의 선수들이 획득한 자랑스런 성과들을 마음속으로 합산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민족의 가슴마다 저절로 민요가락이 흥겹게 넘쳐 강물을 이루는 그날,나는 북경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ㆍ서울을 거쳐 한반도의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한민족 한나라의 깃발이 펄럭이는 그 곳으로.<박충록 북경대조선어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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