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만 전집」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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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생겨날 것 다 생겨나고/사라질 것 다 사라진 후.//그대는 연화대 그늘에/꽃처럼 잠드시어/대저 무슨 꿈을 꾸시는가,//적광전 수려한 눈썹 밑으로/탁발승하나/오늘도 고요히 지나고 있다. //무주사 큰스님은 산에 가시고.』 <다비 후 전문>
1988년10월2일 42세로 타계한 박정만 시인. 임종 직전까지도 「가이 없다. 내 처량천」이라할 정도로 가난과 병마, 삶의 본질적 허무와 처절히 맞섰던 박씨의 시 전집 『박정만 전집』이 출간됐다.
박씨의 2주기를 맞아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영령 앞에 헌정한다』며 외길사에서 펴낸이 전집은 그가 생전에 냈던 9권의 시집과 유고, 시작 노트 등을 총망라, 5백75편의 시를 실었다.
그의 등단 시기인 1968년부터 죽음에 이르렀던 1988년까지 순차적으로 시를 배열, 시를 통한 한 시인의 일대기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했다. 특히 1987년8월19일부터 9월10일까지 20여일 만에 쓰여진 시 3백여편에는 쓰여진 날짜와 시간이 기록돼 있어 「시신과 접한 박씨의 혼」을 엿볼 수 있다.
194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68년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로 서울 신문 신춘 문예에 당선, 문단에 나왔다.
잡지사와 출판사를 전전하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살만한 서정의 세계를 시로써 지켜나가려던 박씨의 시 세계 및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한수산 필화사건」. 81년5월 한씨가 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던 『욕망의 거리』란 소설의 한대목이 문제가 돼 한씨를 비롯, 신문사 관계자들과 함께 한씨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이유로 박씨도 수사기관에 끌려가 3일간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박씨는 직장도 아내도 정신적·육체적 건강도 잃고 안주 없는 소주로 끼니를 때우며 시를 썼다. 그렇게 살다 87년 여름 그의 말대로 「접신의 경지」에서 20여일 만에 3백여편의 시를 토해 놓는다.
5백병 정도의 「소주를 죽여가며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서 들끓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쓴 시 3백여편에는 허무와 한의 정서와 심오한 철학이 응어리져 있어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고 있다. 그렇게 시를 쓰다 산에 간 듯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간」 박정만은 2년만에 『박정만 전집』으로 「무주사」를 지은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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