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이라크가 안정되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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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안정과 개방의 정도를 따져 보면 그 나라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진단할 수 있다. 안정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를 어느 정도까지 극복할 수 있느냐를 재는 척도다. 개방은 사상.정보.상품.서비스의 흐름이 국내외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느냐를 알아볼 수 있는 잣대다.

개방된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국제통화를 하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해외여행도 제한받지 않는다. 시민들은 또 국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관련된 신뢰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반대로 폐쇄된 나라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미국.일본.독일 같은 나라는 개방돼 있기 때문에 안정적이다. 그런데 북한.쿠바.이란 등은 오히려 폐쇄적이기 때문에 안정돼 있다. 폐쇄적인 국가의 소수 지배 엘리트들은 국민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있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의 이라크는 폐쇄돼 있어서 안정적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새 이라크가 개방적이면서 안정적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소련.유고슬라비아는 매우 불안정했다. 남아공은 인종차별 정책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국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붕괴했다.

미국은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 정권을 몰아냈지만 이라크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다. 미국은 이라크의 안정을 보장해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이라크인들이 해내야 할 몫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일본 헌법의 기틀을 마련해 줬다. 하지만 이 새로운 제도에 생기를 불어넣고 일본을 더 새롭고 개방된 사회로 만든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었다.

이라크와 같이 불안정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안정을 최우선시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보자. 보리스 옐친 시대의 러시아는 경제적.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옐친의 후임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국가 안정과 질서 회복을 꾀한다며 정치 권력을 크렘린에 집중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민영화했던 경제 부문도 국가가 다시 장악했다. 그 결과 푸틴은 70%가 넘는 지지를 얻게 됐다. 러시아 국민은 '폐쇄된 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누구도 불안정하고 억압된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부를 만드는 것보다 계엄령을 선포해 질서를 신속히 되찾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이라크가 개방을 기초로 한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의 장기적인 정치.경제.외교.군사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미국 국민이 이러한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지금처럼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라면 이라크인들은 단기적인 안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정파.종파의 적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지지할 것이다.

이라크가 알카에다의 훈련장이나 이란의 위성국가가 되는 것을 확실히 막을 수만 있다면 미국은 또 다른 전제주의 정권을 지지하게 될지 모른다. 이라크를 정치적.사회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이라크인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정리=한경환 기자
이언 브리머 국제정치 컨설팅 회사 유라시아 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