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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금백태(정치와 돈:2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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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여의원 지갑 가로챈 뒤 “나눠쓰자”/「봉투」 줄 때까지 당사서 침묵시위도(주간연재)
「와케」라는 야당가의 은어가 있다.
일어로 「나눈다(분)」는 뜻이지만 야당가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이 여유있는 사람의 돈을 거의 반강제로 나누어 갖는 것을 일컫는다.
평민당 모의원 보좌관의 말. 『보좌관 초년시절 여러번 당했습니다. 매달 20일 (의원및 보좌관 봉급지급일)이나 그 다음날 은행에서 돈을 찾은 뒤 당사에 들르면 안면있는 하위 당직자가 다가와서 내 양복 안주머니에 불쑥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냅니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어리둥절해 하면 상대는 「와케합시다」면서 10만원 안팎의 돈을 꺼내 자기 주머니에 넣고 지갑을 돌려줍니다. 「악」소리 지를 여유도 없이 당하는 거죠.』
이 보좌관은 두어번 이같은 일을 겪은 뒤부터는 지갑속의 돈을 1만원짜리 10장이내로 조절하고 있다. 이중 절반 가량은 뺏길 각오를 하는데,그렇다고 한푼도 안갖고 다니는 것은 친속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는 설명.
11대부터 지역구에서 내리 당선된 민자당 민정계의 박모 3선의원도 비슷한 경험담을 들려준다. 역시 초선의원시절 야당의원들에게 「많이 당했다」는 얘기.
『회기중에 국회의사당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뒤에서 다가와 내 바지 뒷주머니의 지갑을 다짜고짜 꺼냅니다. 기겁을 해 뒤돌아보면 안면있는 야당의원이 빙긋빙긋 웃으며 내 지갑을 자기품속에 놓은 뒤 「이따가 지갑은 돌려 드릴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정색하면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여당이고 초선이라는 「죄」로 그냥 당하고 넘어갔지만 1백만원이상의 돈을 「와케」당한 뒤부터 박의원은 소형 지갑을 따로 마련해 수표등을 보관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알고보니 많은 동료 여당의원들도 같은 방법으로 주머니를 보호하고 있더라는 것.
정치인,특히 야당가에서 정치를 하려면 돈을 많이 갖고 있든가,아니면 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정치인간에는 뇌물이 없다」는 말이 거의 정설처럼 통한다. 김대중 평민당총재도 『남에게 돈을 얻어 쓰는 것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금전관의 일단을 피력한 적이 있다.
물론 전국구지명과 관련된 뇌물성 헌금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동근의원(평민)같은 경우가 있지만 이런 일은 「불상사」에 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말한 평민당 의원보좌관이나 박의원의 사례가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할 리 없겠지만 이들에게 접근해 돈을 얻어내는 야당 정치인들도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있다는 「냄새」도 맡을 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묵시적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감」이 서야 하는 것이다. 특히 야당 정치인끼리의 상하간 또는 동료간의 금품수수는 『필요할 때에 반드시 너 도와주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측면도 강하다.
크게는 대통령ㆍ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작게는 지구당 단합대회까지 사람이 아쉬운 때는 항상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야당가의 돈거래는 계보형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마련이다.
현재 민주당에서 중간당직자로 근무중인 김모씨(57)는 「와케」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국회의원 한번 해보지 못한 채 30년이상을 야당가에서 지낸 김씨는 웬만한 정치인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안면」 때문에 평민ㆍ민주당을 막론하고 금배지를 달고 있는 야당 정치인이 김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고 한다. 굳이 손을 벌리지 않아도 약간의 성의표시가 있게 마련이다. 김씨가 야당가의 정보통이기도 한만큼 좋은 의미로 상부상조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씨의 두 아들은 현재 미국에 유학중이다. 야당의 당직이라는 것이 사실상 무보수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일종의 불가사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김씨만이 아니다. 구 통일민주당의 사무총장을 지낸 현역 A의원(3선)은 11대에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그도 국회의원이 되기 이전에 이미 딸을 미국에 유학보냈었따. 야당생활 20년 만에 처음 지구당위원장직을 맡은 민주당의 B씨도 현재 맏딸이 뉴질랜드에 유학중.
남의 돈을 내것으로 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백태가 연출되는 것도 당연하다.
과거 통일민주당의 원외 지구당위원장을 지낸 백모ㆍ박모씨 2명은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김영삼 당시총재와 고위당직자ㆍ현역의원들로부터 돈을 정기적으로 타내 『백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사람』이란 말까지 들었다. 총재가 돈을 주지 않으면 중앙당사의 총재실 문앞에서 하루종일 침묵시위를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들의 지구당개편대회장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현역의원들은 갖가지 험담으로 시작되는 「압력넣기작전」에 견디다 못해 마침내 봉투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돈을 만들어내든 대부분의 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은 지구당 살림이 궁색하기만 하다. 거물급이 아닌 다음에야 구걸하다시피 조달하는 정치자금이 풍족할 리 없는 것이다.
지난 5월 지구당창당대회를 치른 민주당 부산 동래을 지구당의 노경규위원장은 학연(경남고­부산대)에 의지해 월 2백50만원씩을 간신히 마련,지구당을 운영하고 있다. 부인이 자수점ㆍ건강식품대리점 등 여러 부업을 거치게 했던 노위원장의 신조는 집에 벌어다 주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갖다 쓰지도 않는다는 것.
물론 같은 원외 지구당위원장이라도 여당은 경우가 다르다. 구 민정당의 서울지역 지구당위원장을 지낸 C씨는 『위원장을 맡고나니까 지역구내 기업체 사장부터 빌딩주인ㆍ룸살롱주인까지 여러 「독지가」들이 부위원장직을 자청하더라』고 했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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