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반ㆍ유급제의 선행조건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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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많은 부작용을 예상하면서 초ㆍ중ㆍ고등학교에 내년부터 월반ㆍ유급제가 실시될 전망이다.
이미 이 제도의 실시여부를 심의했던 중앙교육심의회에서도 찬반을 가름하기 힘들 정도의 팽팽한 대립을 보였고 문교부가 지정한 월반ㆍ유급제 시범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찬반이 엇갈린 제도였지만 결국 실시쪽으로 기울었다.
월반ㆍ유급제 도입의 근본취지는 15년여동안 실시된 교육평준화정책으로 학교교육의 수준이 사실상 하향평준화되었기 때문에 교육의 수월성을 살려 평준화정책을 보완하자는 데 그 뜻이 있다.
좋은 취지이고 필요한 보완책이면서도 왜 강한 반발과 반대에 마주쳤던가. 예상되는 반발과 반대의견은 ①월반은 좋지만 유급은 싫다 ②누구나 월반을 원할 때,시험경쟁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③월반의 재량권이 학교장에 일임될 때 치마바람이 더욱 극성을 부린다로 요약할 수 있다.
문교당국이 최종 확정지은 안에는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학부모의 동의를 먼저 얻고 월반의 평가기준을 점수 위주가 아닌 인격형성도로 판정한다는 보완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상되는 부작용을 막기란 마찬가지로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월반ㆍ유급제 실시를 둘러싸고 거론되는 찬반논의에 대해 어느 한쪽의 편을 들거나 어느쪽 의견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양쪽 다 일면의 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취향에 가까운 주장일 뿐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교육의 심각한 문제를 일면의 진실성에만 맞추어 미시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하려들기 때문에 생겨나는 공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당면한 교육의 최대 위기인가. 창의성과 사고력을 마비시키는 암기식 교육과 이런 교육을 요구하는 대화입시 과열경쟁이 학교교육을 망치고 청소년의 인성을 유린한다는 게 누구나 생각하는 우리 교육의 위기현실이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창의성과 사고력을 신장하는 학교교육,그런 교육을 요구하는 대학의 학생선발권이 국가가 아닌 대학이 주도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교육은 살아 숨쉬는 것이다.
무엇이 교육의 수월성인가. 창의력ㆍ사고력ㆍ표현력이 남보다 특출한 학생을 선별해 그들에게 맞는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고 지원하는 것이 오늘의 영재교육이다.
초ㆍ중등교육의 기본목표는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갈 덕목과 최소한의 기술을 습득시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있어야 한다. 우열반을 두고 우등생과 낙제생을 구별하는 학교교육이란 일제의 잔재와 함께 청산되어야 할 교육잔재다.
아직도 우리 교육의 정책과 교육현장의 책임을 진 사람들이 전근대적 교육가치관으로 학생들을 대하고 교육을 주도하려들기 때문에 월반ㆍ유급이라는 허구에 찬 논의를 거듭하게 된다.
특별한 천재가 없는 게 아니다. 현재의 교육방식으로는 그런 천재성 마저 지진아로 만들어버릴 만큼 사고력과 창의력을 마비시키고 있지 않은가.
암기식 위주의 시험경쟁장으로서의 교육현장이 어떤 방식으로 천재를 가려내고 영재교육을 시킬 것인가.
사고력ㆍ창의성ㆍ표현력을 강조하는 학교교육으로 교과과정이 개편될 때에야만 천재와 영재를 선별할 수 있고 우리의 교육 전체도 살아 숨쉴 수 있으며 교육의 수월성이 강조되는 교육풍토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교육정책이란 우리가 안고 있는 교육위기의 실체를 하나씩 해소하는 쪽으로 가야지 그 위기를 가중시키는 쪽으로 기울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문교당국은 교육의 수월성을 월반과 유급제로 접근하기 보다는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에서 사고력ㆍ창의성ㆍ표현력을 살리는 교과과정의 개편과 그에 맞물려 돌아갈 대입제도의 개선과 대학 자체의 학생선발권 허용쪽으로 점진적 개선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구조적 개선이라는 큰 테두리안에서 월반ㆍ유급제가 실시된다면 다행이겠지만,숲은 보지 않고 몇 그루 나무만 베면 해결된다는 미시적 자세로 이 제도를 실시할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뿐임을 자연스레 예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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