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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빠진 증시」구경만 할 것인가/김두겸(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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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때 이곳은 누구도 백만장자로 만들어주는 동화속의 「약속의 땅」과 같은 곳이었다. 부도 일보직전의 기업이라도 이곳에 와 기업을 공개시키면 실제 가치보다 열배나 높은 값으로 주식을 팔 수 있어 하루 아침에 돈걱정없는 우량기업이 됐다.
기존 상장사들은 물타기 뻥튀기 증자로 신주ㆍ우선주를 무더기로 발행,시중자금을 긁어 모았고 의결권 없는 우선주를 즉각 몽땅 되팔아 거금을 챙겼다.
샐러리맨과 소규모 사업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은행빚을 얻어서라도 이곳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순식간에 그들이 받는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다.
정부도 보유주식을 「국민주」로 팔아 떼돈을 챙겼다. 국민주에 대한 인기가 치솟자 정부는 농어촌에까지 파고들어 국민주를 사는 농어민은 모두 도시민 못지않게 잘살게 된다고 바람을 잡아 순박하기만 했던 이 땅의 농민ㆍ어민들마저 대거 한국전력ㆍ포항제철의 주주로 만들었다. 한국최고의 기간산업 주주가 되면 돈벌기란 땅짚고 헤엄치기격이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논팔고 소팔고 나중엔 영농자금조로 빚을 내어서 까지 국민주를 사들였다.
올림픽의 해인 88년은 지구 동쪽 끝에 있는 조그마한 코리아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떨친 해이기도 했지만 이땅에 살고 있는 4천만 국민들도 하룻밤 자고나면 수백,수천만원씩 돈을 버는 꿈같은 해이기도 했다.
정부도 기업도 근로자도 농어민도 하나같이 땀흘려 일하는 것을 외면하기 시작,모두 증권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의 주주수는 8백54만명(88년말)
한햇동안 무려 3배나 늘었다. 증시는 마치 고무풍선처럼 부풀기만 했다.
돈이 무더기로 들어오니 주가는 오를 수 밖에 없고 주가가 치솟으니 다시 돈이 몰려들었다. 주식의 시가총액은 64조5천억원으로 전년비 3배나 늘었다. 이같은 주식붐은 다음해에도 이어져 89년 4월1일엔 드디어 주가지수 1007.7이라는 대망의 1천대를 돌파했다.
12월22일엔 시가총액도 사상최고인 97조7천억원으로 GNP와 맞먹는 1백조원대에 육박했다.
그러나 실물경제 뒷받침 없는 주식시장은 반드시 무너지게 마련이다.
85년 9월이후 이른바 3저에 편승하면서 한국증시가 3년 7개월이라는 유례없는 긴호황을 누렸었지만 일반경제가 뒤따르지 못하자 89년 하반기부턴 끝내 사상누각으로 변했다.
좀 심하게 비유한다면 한국경제의 실체는 하나의 큰 호수수준밖에 안되는데도 증권시장만은 큰 바다에서나 살 수 있는 고래로 둔갑,호수속의 고래가 돼버렸던 것이다.
이제 이곳은 황량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마치 투전판에서 돈딴 사람은 모두 떠나고 패가망신한 낙오자들만이 바닥난 판돈을 두고 서로 핏대를 올리고 있다.
그래도 가끔씩은 쟁쟁한 정치 지도자들이 이곳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저마다 거창한 한마디를 내뱉어 하루 이틀 주가를 폭등시키기도 한다.
증시침체는 본격적인 경기회복이나 기업수익률이 크게 호전되지 않는 한 그 타개가 불가능한 것이다. 올 상반기 성장률이 믿기 어려운 9.9%를 기록,경기회복의 신호탄 같긴 하지만 성장내용이 부실해 체감력이 떨어지고 있다.
상장제조업체의 상반기 경영실적도 매출은 15.6%나 신장됐으나 순이익은 불과 2.6% 증가에 그쳐 기업수익률은 아직도 밑바닥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증시외부요인에 의한 부양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된다.
오늘날의 증시를 이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고 한다면 증시회복책은 어쩔 수 없이 시장내부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8ㆍ30」대책과 같은 이미 널리 알려진 미지근한 대책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좀더 화끈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
증시붕괴의 가장 큰 내부요인은 주식공급과잉이다. 호황이 시작된 86년 이후 올상반기까지 4년 6개월동안 GNP는 80%밖에 성장하지 못했는데 상장주식수는 무려 5백%나 늘어났다.
동경 올림픽이후의 일본처럼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많은 주식을 정부주도로 사들이는 길외엔 방법이 없다.
지금과 같은 증시안정기금 규모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민주를 사라고 권장할 때처럼 정부가 책임지고 적극 나서야 한다. 물가보다 금융공황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못할 것이다. 「주식투자는 자기책임아래」식의 무사안일주의 증권당국자라면 차제에 물러나는 것이 좋다.
증권회사ㆍ상장회사 대주주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 규모는 88년 12조원,89년 21조원,올상반기 6조5천억원이나 된다. 그 돈으로 땅사고 빌딩짓고 하여 부동산값만 올려놓지 않았는가.
상장회사는 증안기금조성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고,특히 증시와 운명을 같이하는 증권회사는 별도 조합을 만들어 과잉주식 소화에 진력해야 마땅할 것이다.
증시붕괴는 일반 투자자들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었다. 증권투자란 본래 정보수집 능력이 승패의 관건이다. 이번 폭락소동에서도 모금융회사 사장은 부양설이 나돈 토요일인 지난달 25일 모주식 우선주를 3억원어치 사 부양책 발표 하루전인 29일 모두 되팔아 5천만원의 차익을 챙겼다.
이같은 프로들이 설치는 곳에 어설픈 정보만 갖고 퇴직금을 몽땅 붓는식의 아마추어 감각으론 주식투자는 절대금물이다. 주식투자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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