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노년생활 대비 10억원 만들기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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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원 만들기' 열풍이 불고 있다.

박봉을 아껴가며 '왕소금' 생활을 자처하는 샐러리맨 등 서민들이 쌈짓돈을 굴려 10억원을 만드는 비법을 찾느라 혈안이 돼있다. 이들이 재테크 전선(戰線)에 뛰어 드는건 '돈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역설적인 이유에서다. 10억원은 있어야 늘그막까지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붐비는 10억 만들기 현장=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다음 카페에서 '10억'이란 검색어를 입력하면 1백개가 넘는 관련 사이트가 뜬다. '맞벌이 부부 10년 10억 모으기'같은 인기 사이트는 회원수가 16만명이나 된다. 이 사이트는 2001년 초 모 카드회사의 대리였던 朴모(31)씨 부부가 개설한 뒤 서민들이 재테크 방법과 애환을 나누는 사랑방이 됐다. '부유한 사람들'이나 '짠돌이'같은 카페들도 부자가 되고픈 이들이 북적대는 곳이다.

인터넷을 통해 돈 불리는 법을 나누는 이들은 '건강한 부자'를 꿈꾼다. 땀 흘려서 번 돈을 적재적소에 잘 굴려 자산을 2배,3배로 키워간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종 금융상품을 활용하는 법이나 절세.경매.주식분석 등의 정보를 교환한다.

서점가에서도 '10억'을 화두로 한 재테크 책이 인기다. '나의 꿈 10억 만들기'를 필두로 '한국의 부자들','부동산으로 10억 만들기'등이 이런 종류의 책들이다.

강연회나 유료 정보 사이트도 성황이다. 지난 9월초 채용정보 회사인 인크루트가 주최한 '10억 만들기 프로젝트를 가동시켜라'라는 강연회엔 1천여명에 이르는 넥타이.아줌마 부대로 성황을 이뤘다. 일년에 수십만원을 내는 재테크 사이트들도 입소문을 타고 이용자가 늘고 있다.

금융회사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은행들은 1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이 있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PB(Private banking)'지점을 만들어 공격적인 마케팅활동을 하고 있다. 자산운용 외에 부동산.법률.세무.건강 등 부자들의 입맛에 맞는 각종 부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증권사들도 단순히 거래 수수료를 받는데서 벗어나 주식.채권.펀드.보험 등을 통해 고객들의 자산을 적극적으로 굴리는 쪽으로 영업 방침을 바꾸고 있다.

10억 만들기가 화두로 등장한 것에 대해 일부에선 위환위기 이후 '부자아빠,가난한 아빠'란 책으로 돈벌기에 눈 뜬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재테크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휩쓸리면 자칫 '부의 축적'이 삶의 1순위 목표가 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왜 10억인가=중년층은 물론이고 20.30대 젊은층까지 미래가 불안하다고 한다.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있으면 도둑놈).사오정(45세에 정년)은 옛말이고, 삼팔선(38세면 퇴직 고민)이란 말이 유행어가 됐다. 특히 '정년 보장'은 사라지는데도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면서 10억이 자연스레 화두가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2020년에 65세 이상인 인구가 14%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지금은 10명이 노인 1명을 먹여 살리지만, 20년 뒤엔 3명이 1명을 책임져야 한다. 부(富)에 대한 갈증이 증폭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40대 중반인 회사원 金모씨가 50대 후반에 퇴직해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경우 대략 10억원의 노후 자금이 필요하다는게 재테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기엔 도시 근로자의 평균생활비(2000년 기준 연간 1천5백만원).여가비 등이 포함된 것이다. 金씨가 모아 놓은 돈이 없다면 지금부터 매월 5백만원 가까운 돈을 저축해야 한다. 자녀 교육비 등으로 돈이 적잖이 드는 시점에서 이정도 돈을 저축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0억이라는 돈이 서민들에게 의미있는 숫자인지 반문하는 이들도 많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10억원은 상징적인 액수라고 강조했다. '나의 꿈 10억 만들기'란 책으로 장안에 10억원이란 화두를 던졌던 교보증권의 김대중(41) 상계지점장은 "부자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국민소득 수준 등을 감안할 때 10억원 정도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만족을 느낄 것"이라며 "노력만하면 샐러리맨이든 군인이든 교사든 누구나 10억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앙이아이피의 박낙규 재테크연구소장은 "10억원엔 다소 거품이 끼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부에 대한 눈높이도 올라 갔다는 것이다. 그는 10억이란 말은 아무리 재테크를 잘해도 이를 모으기 어려운 서민층에겐 위화감을 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朴소장은 "10억이란 '꿈'을 세워두고 1천만원,1억원…,이런 식으로 재산을 불려나가는게 나쁠 건 없다"고 말했다.

◇10억원은 '모으기' 아닌 '만들기'=부자를 꿈꾸는 이들은 10억을 마련하는데 '왕도(王道)는 없지만 정도(正道)는 있다'고 믿는다. 전문가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교보증권 金지점장은 "총괄적인 인생 계획을 빨리 짜 놓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돈을 모으는 것과 만드는 것은 엄청난 차이"라며 "돈을 모으는게 직선 그래프를 그리는 것과 같다면, 만드는 건 포물선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회장이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 등 당대의 부자들도 돈을 만든 사람들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특히 전처럼 금리가 높았을 땐 저축을 위주로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게 가능했지만, 지금같은 저금리 기조 아래선 은행에만 기대는 건 빵점짜리 재테크라는 것이다.

그는 "1천만원이든,1억원이든 종잣돈을 모으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돈이 모이면 부동산이든, 상가든, 장사든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을 빼면 10억원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는 주변에서 10억원을 모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직종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많고 ▶'목돈-투자-목돈'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돈을 불렸으며 ▶내집 마련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부동산.금융상품.세금 지식 등을 축적하고 각종 경제기사를 통해 경제흐름을 꿰뚫으려 노력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고 전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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