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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대한 인식 바꿀 수 있을지…"|국내 첫 개인전집 펴낸 만화가 김수정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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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50년생「피난둥이」라니까 만 마흔살 문턱을 넘긴 셈이다. 청장이 엇섞이되 그나마 장으로 기울 만만치 않은 나이라지만 생김새며 차림은 영판 20대 청춘이다. 짝 달라붙는 푸른색 진바지에 검정 티셔츠를 받쳐입고 멋대로 어깨까지 닿게 늘인 곱슬의 긴 산발이 인상적이다.
어찌보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앰프 기타라도 들쳐 매고 사정없이 흔들 태세가 돼있는 밤무대의 젊은 보컬주자만 같다.
김수정씨(40).
데뷔 후 경력 15년에 이른 인기만화가다. 「둘리」라는 중생대의 아기공룡을 간판 캐릭터로 거느리면서 지금 한창 꼬마들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그가 이달 초 (주)서울문화사를 통해 20권짜리 개인전집을 냈다.
개인전집이라는게 통념상 평생을 저작일에 매달려온 사람이 인생의 황혼 녘에 다다라 지나온 길을 더듬고 정리하는 의미에서 펴내는 마감적 결정물이라면 그의 전집출간은 나이나 작가적 연륜에 비추어 조금은 성급하다는 느낌도 없진 않다.
『젊은 사람이 무슨 개인전집이냐고 저를 건방지게 여길 분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집의 의미를 저는 그렇게 퇴영적이라거나 정태적인 것으로 한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이번 전집출간은 저에겐 마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출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의 활동을 1차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창작세계의 활로를 여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 출판사 측의 전집간행에 동의했다는 그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적 업적에 대한 평가에 머물지 않고 국내 만화에 대한 일반의 사시를 교정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으면 하는게 또 다른 욕심이다.
경남진주가 고향. 어렸을 때부터 예능이 뛰어났던 그는 팔자에 없는 경상대농대 축산학과2년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할 때까지 진주바닥을 단 한뼘도 벗어나 보지 못했다.
군대 제대 후 75년 3월 맨손에 맨발로 서울에 와서 두달여 출가한 누님 집에 빌붙어 도식하다가 그해 5월 소년한국에서 실시하는 제3회 신인 만화공모에 반극화체 작품『폭우』를 응모, 운좋게 당선되면서 만화계에 본격 데뷔했다.
그는 데뷔 후 5년간의 모색기를 거쳐 80년에는 극화체에서 지금의 만화체로 스타일을 바꾸면서『1남4녀 막순이』를 내놓아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선을 단순화시기면서도 기묘한 섬세함으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한『아기공룡 둘리』를 처음 선보인건 84년 4월. 월간만화잡지『보물섬』에 연재를 시작해 지금껏 계속하고있는『…둘리』의 인기는 한마디로 폭발적이다. 이 만화는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87년 추석, 88년 어린이날 두차례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KBS-TV의 전파를 탔다.
그의 작품들은 만화란 장르에 허여되는 무책임한 상상력만으로 내용이 꾸며지지 않으며 거개가 서민들의 일상적 삶을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용해시킨 현실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의 캐릭터는 그래서 언제나 낯설지 않은 이웃으로 다가오고『어떤 각색에도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다.
김씨의 만화가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억지 개그에 의탁하여 섣부른 웃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화를 단지 1회용의 소모품으로만 보는 일반의 인식을 저는 혐오합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한바탕 웃고 치워버리는 만화가 아니라 10년, 20년을 지내고도 생명을 갖는 만화, 읽고 나서 오랜 시간 생각해야 비로소 웃을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격조의 만화」를 특별히 강조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 만화가는 박기정씨. 카투니스트로 인물만화란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박기정씨는 젊어서『가고파』, 니『들장미』니 하는 소년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금씨는 그를 국민학교 시절 형을 따라 드나들던 만화 대본소에서 처음 만났다. 『박 선생님의 만화는 논리성이 강하며 문학적 향기가 살아 숨쉽니다.
그분은 저에게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였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저질의 포르노성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일부 동료작가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다.『돈에 지배되어 그런 식으로 시류에 영합하다간 만화 자체의 생명마저 죽이게 된다』 는 것이다. 그자신도 여러 차례 연재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소이연이다.
이번에 낸 20권의 전집 속에는『오달자의 봄』 1·2, 『소금자블루스』1·2, 『자투리반의 덧니들』1·2, 등 모두 6권의 하이틴물을 넣었다. 아동만화·성인만화만 있고 하이틴세대를 선도할 건전한 만화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할 할애다. 그는 이것이 하이틴 만화를 위한 새로운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
『실패할 경우 개인적인 좌절감은 물론 출판사 쪽에도 재정적 부담을 안겨줄 것 같아 전집출판을 몹시 망설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것도 같습니다. 그럭저럭 책도 잘 팔린다는 소식이고….그러나 이 전집이 무엇보다도 전체 만화작가들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만화의 서점 유통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돈을 벌면 스머프니 미키마우스·아톰 같은 우리고유의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만화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 꿈.
뒤로 숲을 두른 방학동 단독주택에서 부인·아들·딸 등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산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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