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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이의 생가-강릉 오죽헌|시인 이근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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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떻게 태어나면 나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어떻게 공부하면 나라에 큰 일을 하는 재목이 되고, 어떻게 살아가면 만인이 우러르는 성인이 되는가.
율곡 이이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배운다. 그는 「해동 공자」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드높은 학문과 앞을 내다보는 정치와 성인다운 삶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조선조의 큰 스승이었다.

<조선조의 큰 스승>
성현이나 영웅들은 한결같이 신격화하는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그 황탄함에 비해 율곡의 탄생 설화는 매우 사실적이며 비범한 것도 아니어서 이 역시 율곡다움을 엿보게 한다.
오죽헌 (강릉시 죽헌동 201)은 피서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경포대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너무도 잘 알려진바 새삼 율곡의 생가로 소개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율곡의 자취를 더듬자면 오죽헌을 찾지 않을 수 없으니 어쩌랴.
지금 오죽헌 안채에는 몽룡실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다. 율곡은 여기서 찰방 벼슬을 하는 아버지 원수공과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중종 31년·1536년). 이 집은 율곡의 외가이며 그 이전에 사임당의 외가였다. 그리고 율곡보다 먼저 사임당이 여기서 태어났으니 풍수지리를 믿지 않는다 해도 예삿일은 아니다.
몽룡실이라는 이름은 율곡의 태몽과 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의 꿈이 모두 용꿈이었다는데서 얻어진 것이며 율곡의 어릴적 이름이 현룡이었던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이 유서 깊은 집이 오죽헌으로 불리는 것은 율곡의 이종인 권처균이 집주인이 된 후 검은 대(오죽)가 많은 집이라 해서 스스로 아호를 오죽헌으로 했던 데서 비롯된다.
사임당의 어머니가 형제가 없어 친정살이를 했듯이 사임당 또한 친정살이를 하는 별난 운명이 작은 선비의 집 한 채를 어느 고루거각보다도 휘황찬란하게 만대에 빛을 뿜는 위대한 역사적 산실로 만든 것이다.
율곡은 여섯살에야 어머니 사임당을 따라 서울에 오게 된다. 세살 때부터 글공부를 했던 율곡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글재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일곱살 때 『진복창전』을 지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화석정시는 여덟살 때 쓴 작품이니 그의 시재가 어떠한가를 굳이 덧붙일 일이 아니다.
더욱 그가 열살 때 썼다는 「한 기운이 흘러서 변화를 이루니 맺어지기도 하며 풀어지기도 하는구나…」로 시작되는 『경포대부』는 글 잘한다는 당대의 시인들이 마음먹고 쓴 어느 글보다도 뛰어나니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장원급제 9차례>
율곡은 진사초시에 장원급제를 하기 시작하여 과거에 장원급제만 아홉번을 한다. 당시 글공부를 하던 젊은이들이 그를 구도장원공으로 부르며 그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에 찬사와 함께 부러움을 표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그러나 일취월장의 율곡에게도 시련은 찾아들어 열여섯살 때 어머니 사임당을 여의게 된다.
그는 자운산의 묘소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에 나아가 시묘 3년을 지내고 금강산에 들어간다.
율곡에 있어서 사임당은 육친의 어머니를 넘어서 학문과 시서, 그리고 사상까지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요, 정신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에 대한 사모와 존경의 정이 남달리 깊었던 율곡인지라 사임당의 죽음 앞에서 그는 마음의 흔들림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에 몰입하고자하나 결국 자신의 길이 유학임을 깨닫고 돌아온다.
금강산에서 나와 다시 오죽헌에 온 것은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 그는 자신의 삶의 규범을 세우는 『자경문』 을 여기서 짓는다.
전15조의 이 덕목의 1조는 「모름지기 크게 뜻을 세우고 성인이 할 바를 법으로 지키고 털끝 하나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했으면 곧 내가 할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경구 속에서 율곡은 성인이 되는 길을 정하고 그것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지켜나갔음은 그의 전 생애가 보여주고 있다.
율곡이 다시 오죽헌에 온 것은 서른네살 때 외조모의 문병을 위해 임금의 허락을 받고서다. 기록에는 이 해에 호당-임금이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는 일-에서 『동호문답』을 지어 선조에게 바쳤으니 바로 이 책도 오죽헌에서 지은 것이며 그가 외조모의 문병을 겸하여 사가독서를 한 호당이 곧 오죽헌임도 밝혀진다.
『동호문답』은 왕도 정치의 덕목을 밝힌 것으로 임금의 길, 신하의 길, 백성을 잘살게 하는 길 등 11조로 엮어진 율곡의 명저 중 하나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에 이 호당 (오죽헌)에서 그는 성숙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한편의 가십 (좋은 시) 을 낳는다.
「호당의 밤에 앉아서」
호당에서 이슥토록 잠은 오지 않고
밤 공기가 서늘하게 몸에 젖어온다
잎들이 모두 졌으니
가을이 저문줄을 알겠고 강물이 밝게 차오르니
달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성긴 솔은 제 그림자를 흔들고
기러기 떼 내리는 소리 들려온다.
부끄럽구나 거친 세상의 나그네
맑은 물가에 와서도
욕망의 때를 씻지 못하고있으니.
(「호당야좌」 호당구부매 야기저인청 섭진지추노 강명견월생 소송요탑영 새안낙사성 임류미탁영)
이 한편의 시는 전해져 오는 그의 수백편 시를 미루어 알게 하는 정서와 사상을 함께 담고 있다. 스스로 『자경문』까지 지어 어김없이 지켜온 그가 세속의 때를 못 벗음을 부끄러워하는 겸허함을 우리가 어찌 흉내라도 낼법한가. 저 대자연의 오묘함 속에 자신의 알몸을 부끄럽게 드러낼 줄 아는 시심 앞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교우로는 퇴계 이황, 우계 성혼, 귀봉 송익필 등이었다. 그는 이들 석학들과 철학과 경세를 논한다.
특히 그가 스물세살 때 도산으로 가서 서른다섯살 위인 당대 거유 퇴계를 만나서 이틀동안 학문을 논한 것은 그의 탐구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후세의 학자들은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이기론과 사단칠정설에서 퇴계의 이론과 달리하는 새로운 해석을 갖기도 한다.
백사 이항복이 최유해에게 보낸 편지에 「율곡 선생이 해주에 계실 때 대장간을 지어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식량을 구했었다. 이것은 의로운 일은 큰 인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쓴 것을 보아 평소에 식량이 떨어져도 지방 목민관들이 보내주는 곡식을 일체 돌려보낸 율곡이 대장간을 해서 호구를 했던 것은 백 권의 책에 값하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10만 양병론 주장>
안타까운 일은 율곡이 나라의 정사가 문약에 흐르는 것과 외침의 위험을 막고자 부국 강병책인 『만언소』 (47세)와 『시무육조』『시폐봉사』 (48세)를 거듭 올렸으나 동인들의 탄핵으로 오히려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소인배로 밀려나는 정치의 어둠이었다. 율곡의 10만 군대를 뽑자는 양병론이 반대파의 주장으로 꺾인 지 10년 뒤 (율곡의 사후 8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침략을 당하고야 율곡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찍이 사람을 알아보고 이순신을 유성룡에게 천거해 두었으니 그나마도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던 것이리라.
선조 17년 (1584년) 율곡은 마흔아홉살로 세상과 작별하고 자운산 어머니 사임당의 곁으로 간다.
아아 저 가을 하늘같이 드높고 맑은 율곡의 학덕을 내 어찌 함부로 우러를 수 있으랴. 조부 앞에서 무릎을 끓고 철없이 읽던 격몽요결을 다시 마음 가다듬어 펼쳐보리라. <사진·신동연 기자>

<오죽헌>
바다를 보러 오는 길에
오죽헌을 들르곤 했었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과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어째서 그 이름 속에는
가늘고 검은 대나무가
늙지 않고 늘 푸르게 자라는 것인지
그런 까닭은 알 턱이 없고
아무 뜻도 없이 집 구경 삼아
여기 저기 기웃거리면서
겨울 바다에 와서
여자와 팔짱을 끼고 수평선을 보고
모래밭을 거닐어도 보는
여름철이면 파도에 몸을 적신다든지
그런 것만으로는
직성이 안 풀린다는 듯이
한번쯤 오죽헌을 돌아보고 했었다
그러나 이 여름 나는 부끄럽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내게
격몽요결을 가르쳤던 일이 생각나고
내가 몇장까지 읽었던가
…비례물동하며
어디 한번도 그래본 적이 있었던가는
도무지 생각이 안나는
그러고 보니 오죽헌의 어디
내가 발을 디딜 땅이 아님을
바다에 오다가다 들러서는
더욱 훌쩍 돌아보고 가는 일은
이제는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어렴풋이 잘못 살아온 것도 알게되는
그래서 이 여름 나는
갑자기 부끄럽다.
※비례물동: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율곡 지음 『격몽요결』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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