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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특별 취재팀 50일간 현장에 가다(34)|가난한자 편에 서는 「빈자의 교회」로|해방 신학의 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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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남미 가톨릭의 「해방 신학」은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린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CELAM)를 계기로 많은 수의 중남미 가톨릭 주교·신부·수도자·평신도들이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들의 편을 들고나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시작했다.
이웃 사랑을 가난 극복의 방법으로 택한 해방 신학은 하느님 사랑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간주하면서 일부 강경 노선에서는 「사회주의 혁명」까지를 포함한 변혁의 실천 (Praxis)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빚었다. 특히 70년대부터 우익 파쇼의 무자비한 탄압이 노도처럼 출렁인 라틴 아메리카의 불의한 상황에 항거한 해방 신학 운동은 비슷한 상황의 제3세계를 한때 풍미하기도 했다.
해방 신학의 태동 배경으로는 우선 인구의 3분의 2가 절대 빈곤층이라는 처절한 라틴 아메리카 상황과 중남미 가톨릭 교회 자체의 각성, 제2차 바티칸공의회 (62∼65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유럽 자유주의 신학, 역대 교황의 회칙들을 손꼽을 수 있다.
이밖에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 태동 배경의 하나로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한 반공 십자군 운동을 들 수 있다.

<쿠바 혁명에 충격>
보수 우익들로부터 「좌경」이라는 거듭된 비판을 받아온 해방 신학이 아이로니컬하게도 반공 운동에서부터 태동했다는 점은 아주 공교로운 역설이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들은 1959년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공산 혁명으로 성직자의 70%가 추방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실감, 공산주의 혁명을 막으려는 반공 십자군 운동에 흔쾌히 앞장섰다. 이때의 가톨릭 교회는 미국 케네디 행정부와 똑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최상의 방도는 사회·경제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믿고 30∼40년대부터 여러 나라들에서 조직된 「가톨릭 액션」 단체들을 통해 반공 운동을 펴나갔다.
그러나 이같은 초기 교회 반공 운동은 월남전 초라는 시기 선택과 복잡한 사회 구조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군사적·정치적 관점의 성공 여부만을 가리는 전술상의 실수로 실패하고 말았다.
교회와 미국 정부는 1차 목표를 좌익 정치 운동과 게릴라 집단 소탕에 둠으로써 미국의 대외 정책과 견해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가 돼버리는 비극을 불러왔고, 민중의 생활 참상을 불러온 진정한 요인인 5백년에 걸친 사회·경제적 억압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군사적·정치적 반공 전략 구상에만 몰두하면서 수단인 「개혁」을 목적시한 이같은 반공 운동은 끝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근본적 개혁 실패>
그래서 칠레같은 나라에서는 교회의 개혁 추진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우익 군사 정권을 통한 「개혁」을 추진해 보기도 했지만 군사 정권의 잔혹한 탄압과 전체주의적 사고는 마르크스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구실만 더해 주었다.
루뱅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2차 대전 때는 지하 저항 단체의 일원이었던 벨기에 예수회의 베자망스 신부가 미국·독일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60년대에 칠레에서 전개한 반공 운동은 근본적인 결함들을 치유하지 않은 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낡은 사회위에 「현대」의 표피만 씌우려는 기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교회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심각한 사회·정치·경제 문제인 「가난」의 뒤에 도사린 빈부의 양극을 선명하게 보는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늘어나는 빈민가, 가난한 농촌, 대학교 등에 폭력 혁명의 씨앗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진보적인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교회들은 지금까지 맺어온 보수 부유층과의 전통적인 유대를 후회하면서 편을 바꾸어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특히 한때 교회의 주축을 형성한 상류층 젊은이들까지 마르크시즘을 지지하자 크게 당혹했던 성직자들은 진정한 개혁을 위한 사회 구조의 심층 분석을 시도했다.
이때부터 해방 신학의 씨앗은 싹트기 시작했다.
교회의 각성과 새로운 인식이 꿈틀거리는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엄청난 충격을 던져준 사건은 군사 쿠데타에 의한 브라질의 굴라 인민사회주의 정권 (64년)과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73년)이었다.
이 두 사건에서 진보적인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방법인 개혁주의 정부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고, 일부 과격한 성직자들은 이 두 사건이야말로 평화적 혁명의 오류를 극명하게 입증한 중남미 역사의 전기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 정권들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면서 교회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정치 현실에 새삼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진보적 성향 확산>
CELAM 회장 겸 브라질 주교회의 의장이며 78년 교황 선출 때 유력한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던 알로이시오 로르샤이데르 추기경은 사제들의 이같은 진보적 성향이 날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76년 다음과 같은 강경한 선언을 했다.
『가난한 민중의 학대는 곧 그리스도의 학대다. 안보의 명분은 그것이 인간 파괴를 의미할 경우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자세는 복음의 견지에서 악에 대항하는 교회가 취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예언자적 입장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 존엄과 발전의 필요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돈과 이윤에만 비중을 둔다고 생각한다. 라틴 아메리카 교회가 역사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동맹자 노릇을 한데 대해 「광범한 후회」를 나타내기 시작한 이상 중남미의 수많은 주교들은 메델린 주교회의 결정 사항을 따라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에 앞서 브라질 상파울루 교구장 파울로 에바리스트 아른스 추기경은 72년 『인간 존엄성이 유린되고 무시되는 때에 평화롭게 기도만 할순 없다. 법적 보장에 대한 존경심의 결여는 사회 불안정을 의미한다』는 교구 사목교서를 발표하고 『구약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약한자들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그리스도는 아주 분명하게 당신을 비천한 백성들과 하나되게 하셨다』는 강론을 통해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거듭 강조했다.
해방 신학의 이론적 체계는 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페루)가 해방 신학의 바이블격인 유명한 『해방 신학』 (ATheology of Liberation·73년 영역)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면서 틀을 잡았다.

<총든 토레스 신부>
라틴 아메리카 성직자들 사이에 「혁명 없는 개혁」이란 국민 대다수가 적어도 상당한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시민적 권리와 의무를 분별할 수 있으며 자신들을 지킬 태세를 갖춘 서구·미국 등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이런 조건을 갖추지 않은 중남미에서는 정상적 개혁이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을 때 이같은 생각을 앞장서 이론과 행동으로 전개한 대표적 사제가 구티에레스 신부와 카밀로 토레스 신부 (콜롬비아)다.
루뱅대 동기 동창인 이들 두 신부는 학창 시절 사회 과학을 접목시킨 자유주의 신학 수업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콜롬비아의 한 유복한 가정 출신인 토레스 신부는 급우이며 사상가의 길을 택한 구티에레스와는 달리 행동가의 길로 나섰다. 그는 평화적인 개혁 방법들이 이렇다할 성공을 못거두자 신부복을 벗고 게릴라 인민 해방 전선에 합류, 총을 든 채 66년2월15일 37세로 안데스 산록 접전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다수의 신부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죽어야한다」는 생각을 배척하는 입장을 보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의 하나가 신학자 구티에레스 신부였다.
두 사람 모두 근본적인 사회 변혁에 대한 의견은 같았지만 구티에레스는 토레스의 방법을 지지하지 않고 페루의 지식인으로, 제3세계 신학의 대변자로 나섰다. 그는 우선 라틴아메리카 경제·사회 저개발의 요인을 밝히는 분석 지침으로 마르크시즘에 눈을 돌리면서 희랍적인 연역법의 신학과는 정반대인 귀납법의 신학 체계 수립에 착수했다.
구티에레스의 귀납법적 신학은 현실에서 사상을, 경험에서 이론을 정립하는 것으로 성서는 말씀에 앞서 사건이 있었으며 이러한 방법이 기독교 전통의 본원적 교의중의 하나라는데 근거를 두었다.
따라서 해방 신학은 성서 말씀 (Text) 보다는 성서에 대한 문화적 해석과 상황 (Context), 개인적 소명 (Vocation)보다는 공동체적 소명 (Convocation)을 강조하면서 구약의 『출애급』과 『시편』 『잠언』, 신약의 『누가복음』등을 가난·억압·착취로 요약되는 중남미 상황들에 비추어 재해석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방 신학을 일명 「상황 신학」이라고도 한다.
소장 해방 신학자들은 이같은 귀납적 신학의 출발점을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두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우선 교회를 지상으로 끌어내러 현실에 직면케 했다.

<공의회 결론 적용>
해방 신학의 체계 정립에는 교회는 이 세상 자체고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지 하늘나라 옹호자들이 모인 내세 집단이 아니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사목 헌장』 내용과 이같은 공의회 결론을 라틴 아메리카 교회에 적용시켜 「빈자의 교회」로 유도한 제2차 CELAM의 문헌 내용들이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해방 신학 형성에 가장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CELAM은 이미 중남미 교회들이 공산주의를 우려하고있을 때인 1955년 진보적이며 초인적 조직가인 라랭 주교 (칠레)가 『가톨릭 교회가 계속 부유한 지배 계급의 소수자 종교로 남아 있다가는 대중을 잃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질적인 중남미 여러 나라들의 주교들을 모아 조직한 기구로 2차 회의에서 브라질의 카마라 대주교를 비롯한 진보적 주교들이 바티칸 공의회 문서 내용과 사상을 확산시켰고 루뱅대 출신 신학자, 구미 교육을 받은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산하 연구 기관에서 연구케 하여 「해방 신학」을 세상에 내놓게 한 진보적인 중남미 가톨릭 교회의 대부적 기구다. 글 이은윤 특집부장 문일현 기자 사진 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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