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3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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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전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이주하ㆍ정태식 구출 “희망적”/김삼룡만 희생양… 변호사ㆍ취조관이 협조 언약
평양의 박헌영과 연락가능성이 전혀없는 가운데 나는 독자적으로 잔존조직을 지도하며 남로당 지하당의 기치를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첫번째 과제는 조직의 재검열이었다.
둘째,재정이 충당문제였다.
그럭저럭 정태식이 체포된지 근 한달이 다 되어갔다. 이제쯤은 채항석집의 감시도 풀려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채항석부부와 연락,정태식이 어떤 경위로 체포되었나를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대낮에 채항석의 집을 찾아갔다. 현관을 들어서서 아무소리도없이 집안을 살펴보고는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봤다.
마침 채의 부인은 없고 아이들만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보더니 반가워 뛰어와 부둥켜 안겼다. 조금 기다리니 채의 부인이 돌아왔다. 『아이구,김선생님(나의 가명)』하며 그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말에 따르면 채의 생질인 R가 변귀현을 S검사의 동생에게 연결시켜 주고 뒤에 미행이 붙은것도 모르고 정태식에게 보고 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어 수사당국에 모두 자백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한편 R가 체포된 것도 모르고 밤9시쯤 되었는데 갑자기 『전보 왔어요』하며 현관문을 두드려 문을 열었더니 난데없이 형사대가 들어왔고 안방에서 채항석과 이야기하고 있던 정태식은 엉겁결에 벽에 쳐놓은 커튼뒤에 숨어 버렸다.
몸이 작은 정태식은 두꺼운 빌로도 커튼뒤에 숨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채항석부부만 잡혀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찰신문에서 정태식은 며칠전에 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으나 R와 그집 식모는 오늘 저녁밥을 채와 같이 먹고 방안에 있었다고 자백,형사대는 다시 채의 집에 가서 지하실부터 천장,지붕까지 다 수색을 해 봤지만 정태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새벽 3시가 지나 정태식은 몇시간이나 커튼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아프며 몸이 지쳐 있었다.
커튼 틈으로 가만히 내다보니 형사 하나가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태식은 커튼속에서 가만히 빠져나와 졸고 있는 형사 뒤를 돌아서 옆방 지하실로 들어가 앉아 처음으로 발을 뻗고 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침 수사기관에서는 최후로 집안을 한번 더 수색해 보고 없으면 그만 단념하려고 다시 왔다.
정은 그런 것도 모르고 지하실은 처음부터 몇번이나 수색했으니 다시는 안들어 오겠지 하고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던 차에 드디어 발견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김선생님,마침 정선생 취조관이 미군정때 우리 아버지 부하였어요. 정선생의 구출을 위해 저의 살림을 다팔았어요. 화물자동차 두대 가지고 있던 것도 팔고 제가 시집올 때 우리 아버지가 사준보석반지며 남편집에서 사준 보석반지까지 다 팔았어요. 정선생을 살려야지 어떻게 하겠어요』하며 채의 부인 장병민은 울었다.
친형제간이라도 이렇게 못해줄 것인데 나는 너무나 고마워 『부인,뭣으로 부인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김선생님』하며 장은 말소리를 낮추고는 『정선생 취조관이 다른 곳으로 취조하러 간다고 속이고 여기 우리집으로 정선생을 데리고 오면 의복도 갈아 입히고 밥도 해 먹여요. 그런데 정선생이 탈출하겠다고 김선생님을 만나면 안전한 아지트를 곧 준비해 달라고 하더군요』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대관절 그 취조관이 누구요』하고 물었다. 『이북사람인데 장가라고 우리일가래요. 그 사람 소원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인데 우리 아버지에게 국회의원에 나가도록 잘 이야기 해 달라고해요. 정선생만 살려주면 물론 내가 다 해주고 일평생 먹여 살리겠다 했어요. 그래서 지금 조서를 꾸미고 있는데 20년 징역을 받을 조서를 꾸미고 있어요. 이번 17일날 용산 육군본부에서 김삼룡ㆍ이주하ㆍ정태식 등의 재판이 있대요. 제가 미군정청 경무부차장을 하던 C를 변호사로 댔어요. 그 변호사 말로는 김삼룡은 사형을 못면하니 할 수 없지만 이주하는 일단 사형선고를 해놓고 그 다음은 자기가 살리겠대요. C변호사가 함경도 사람입니까』라고 그녀가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하니 『이주하가 함경도 사람이라지요. C변호사가 이주하는 꼭 살리겠대요. 그런 인물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했어요』라며 그녀는 희망섞인 말을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남로당 지하당의 대표인 김삼룡은 전책임을 지고 죽고 이주하와 정태식이 살아 나오게 되면 남로당 지하당의 노선이 많이 달라지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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