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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없인 통일도 없어요”/임진각접촉 지켜본 통일운동가 김낙중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남북 양쪽 접근태도부터 불성실/아직 50년대식 냉전의식 못떨쳐”
『남다른 상념에 젖어 북한측 예비회담대표와 우리측 영접단이 건너올 임진강 자유의 다리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러나 기어코 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비통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국전쟁직후 남북간에 서슬퍼런 냉기류가 흐르던 55년 6월18일 24세의 나이로 자신이 직접 기초한 통일방안인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안」을 몸에 지니고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 북녘땅을 밟은뒤 이듬해인 56년 6월22일 휴전선을 넘어 남으로 돌아온 김낙중씨(59ㆍ전 고대노동문제연구소장ㆍ서울 갈현동)는 예비회담 무산과 관련,통일문제에 대한 남북양측의 접근태도에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했다.
『서로간에 화해가 싹트지 않고는 통일은 요원합니다. 이번만해도 남북한은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고 상대방을 헐뜯기에 바빴습니다. 우리내부에서도 화해정신이 부족,전민련의 의사를 무시한 정부측의 일방독주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26,27일 임진각에서 이틀동안의 예비회담접촉을 유심히 지켜보았다는 김씨는 『세계는 대화해시대라는 위대한 역사를 개막했으나 한반도는 아직도 50년대식의 냉전의식과 흑백논리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며 자신의 역정을 소개했다.
5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김씨는 전쟁과 전쟁후 굳어진 빙탄불상용의 남북권력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끝에 55년2월 25세 미 만의 청년들로 구성된 생활공동체건설을 내용으로하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안」을 작성,이승만 전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김씨는 역시 북한의 김일성에게는 이같은 안을 전달하고 통일문제를 논의하고자 같은해 6월 임진강을 건너 북측의 지뢰밭을 기적적으로 통과,월북했으나 남쪽의 공작원으로 오인돼 당시 박헌영이 수감돼있던 평양내무성 예치실에 갇혔다.
북한에서 1년간 체류한 김씨는 건강이 호전되자 남북접촉에 의해 남쪽으로 송환됐고 역시 간첩으로 오인돼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57년6월 석방됐다.
출소후 고려대 경제과로 전학,노동ㆍ통일운동 등에 관심을 쏟던 김씨에게 63년 학생간첩이란 누명이 씌워져 반공법위반죄가 적용돼 3년6월형을 언도받았다.
김씨는 또 10월유신반대투쟁으로 73년5월 7년형을 선고받고 80년 만기출소했으며 지금까지 주거제한 등 보호관찰을 받고 있다.
민족통일촉진회(회장 송남헌) 통일정책의장인 김씨는 파란만장한 인생경험에서 얻은 결론인듯 『통일운동은 사회의 곪은 분야를 치유하는데에서부터 시작돼야하며 이것이 사회위기를 모면하는 카드로 사용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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