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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달리 노벨상 수상자겠어 ? 그런데 왜 이리 아쉬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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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번 주 문학터치는 이태 전 출간된 책을 소개한다. 따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뜬금없는 건 아니다. 오늘의 책은 오르한 파무크(54.사진)의 장편 '내 이름은 빨강'(전 2권, 민음사, 이난아 옮김)이다. 그래, 맞다. 지난주 목요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파무크의 대표작이다. 외려 가장 뜨거운 소설일 수 있다.

사실,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올해도 노벨 문학상은 남의 나라 잔치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집는 자세부터 반듯하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흠 잡을 건 없나 두리번거리고, 딴죽 걸 건 없나 샅샅이 톺은, 고약한 심사로 시작된 독서였다.

소설은 한 마디로 줄여 말하기 힘들다. 마늘 한 통 마냥 여러 쪽이 꽉 물려 있다. 16세기 터키의 이야기이니 우선 역사소설이다. 궁정화원장 '오스만' 등 실존인물 몇몇이 등장하니 요즘 유행한다는 팩션(Faction)이라 불러도 되겠다. 두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살인자를 추적하는 얘기가 줄거리를 이룬다는 점에서 추리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고, 이스탄불 최고의 미인이라는 '셰쿠레'와 사촌오빠 '카라'의 사랑 이야기도 서사의 한 축을 거뜬히 담당한다.

그러나 소설은 '예술 문학'으로 불려야 옳을 듯싶다. 신념과 사상에 관한 묵직한 소설 말이다. 16세기 전까지 터키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선 아니 되었다. 신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원근법이란 것도 이교도의 화풍이었다. 사원이 뒤에 있다고 해서 개나 나무처럼 풍경의 하나로 조그맣게 그려넣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신은 늘 복판에 있어야 했다. 모든 예술은 신을 위해 복무해야 했다.

소설은 터키에 원근법이 전파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다 보니, 옛 전통을 지키려는 자와 새 전통을 세우려는 자가 맞부닥친다. 가만, 제법 낯익은 설정이다. 그래, 우리 문학에서도 익숙한 갈등 구조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에서도 가치관의 충돌이 서사의 뼈대를 이룬다. 예술가의 혼만 말한다면, 우리에겐 이청준의 '서편제'가 있다.

하나, 소설은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소설은 모자이크의 구조를 차용한다. 한 조각씩 끼워 맞춰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이, 소설은 장(Chapter)마다 화자를 바꾼다. 숱한 등장인물이 교대로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 식이다.

그래도 여기까진 그리 낯설지 않았다. 한데 그 화자란 것이, 직전에 살해당한 시체부터 개.말.나무.화폐 따위를 거쳐 빨강까지 번져나갈 땐, 난감하기까지 했다. 상상력이 거침없다고 해야 하나, 구성이 치밀하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빤하다면 빤한 소재를 전혀 빤하지 않게 다룰 줄 아는 파무크의 재주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작품보다 작가에 관심이 쏠리곤 한다.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심사하는 걸 알면서도,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영향을 미쳤느니 어땠느니 하는 보도가 잇따른다. 그래서 오늘은 부러 작품만 놓고 말했다. 그리고 털어놓는다. 지난 주 스웨덴 한림원의 결정에 순순히 동의한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내년 이맘때도, 그러니까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다음에도 번역 문학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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