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이러니(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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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을 여행중인 앙드레 지드가 스탈린에게 전보를 칠 일이 생겼다. 그는 우체국에 들어가 전보용지에 내용을 적어 직원에게 내밀었으나 그 직원은 전보를 접수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붙이는 「인민의 아버지」 「위대한 교사」 등의 관형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무슨 회의나 집회가 있을 때면 언제나 도중에 나타나 무대뒤에 자리잡는다. 그러면 군중들은 이 겸손한 지도자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다.
이런 떠들썩한 연극이 끝나면 정해진 스케줄대로 어느 구석에서 『위대한 스탈린 만세』하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이때도 스탈린은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점잔을 빼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답례를 하는 일도 없다. 자기도 박수를 치며 같이 즐기는 체 시치미를 뗀다.
스탈린은 다른 당간부들처럼 휘황찬란한 훈장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노동영웅이라는 조그만 금빛의 별만 가슴 한쪽에 붙이고 있을 뿐이다. 자동차도 다른 간부들처럼 외제승용차를 타지 않고 투박한 국산차를 즐겨 탔다.
그리고 운전사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회색외투를 입혔다. 실제로는 테러리스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이지만 대중들에게는 가장 민주적 지도자라는 면모를 보이는데 손색이 없는 제스처였다. 그는 대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스탈린에게는 즐기는 오락이나 스포츠도 없었다. 물론 독서도 안했다. 음악은 겨우 베르디의 『아이다』를 몇번 들은 것 뿐이다. 따라서 스탈린에게는 정치와 권력이 생활의 전부였다.
스탈린은 여간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침묵이며 그것은 약간의 신비성마저 주었다. 그는 코카서스인에게 흔히 있는 조급한 성격을 눌러 숨기고 참고 견디어 민중의 움직임을 보면서 조용히 시기를 노렸다. 그리고 그 시기가 왔다고 생각될 때 그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각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게 스탈린의 한국전 개입비화다. 그리고 그 스탈린에게 애걸하다시피 군비를 얻어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초한 사람이 오늘 한소회담을 「구걸외교」라고 비난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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