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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폭 명령 기다리다 女테러범 18명 질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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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이었다. 2002년 10월 23일 체첸 반군 테러범들이 모스크바 문화궁전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진압과정에서 테러범들은 온갖 폭탄으로 무장하고서도 자폭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재빨리 사살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국의 더 타임스가 22일 보도한 특집 기사에 따르면 진상은 따로 있었다.

인질극에 참가한 체첸 반군은 모두 60명. 남자 42명에 여자 18명이었다. 허리에 폭탄띠를 두른 사람들은 블랙 위도(Black Widow.여자 자살폭탄 테러범)뿐이었다. 블랙 위도들은 홀의 가장자리를 에워쌌다. 사방을 폭탄으로 봉쇄하는 역이었다.

더 타임스는 대부분 젊은 여성인 블랙 위도들은 봉건적인 남성 중심 질서 속에서 자랐고, 테러에 차출된 것도 남성들의 뜻에 따라서였다고 보도했다. 따라서 남성들의 말에 절대 복종했다는 것이다. 진압군이 공연장 내에 신경가스를 뿜어 넣으며 벽을 뚫고 뛰어드는 순간 당황한 남자 대원들은 폭발 명령을 잊었다. 그 때문에 블랙 위도들은 아무도 폭파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진압군은 가스에 중독된 블랙 위도 18명을 모두 사살했고 폭탄띠도 제거했다.

당시 나란히 숨진 가니에바 자매는 남자 형제 3명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집안 출신이다. 마지막 남은 남자 형제 루스탐은 바자예프가 이끄는 반군 소속이었다. 루스탐은 인질극 발생 한달 전에 여자 형제 둘을 블랙 위도로 데려갔다. 바자예프는 자매의 차출에 따른 위로금 3천달러를 가족에게 주었다. 살아남은 여동생은 언니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 두려워 체첸 정부 당국에 신변보호를 요청했고, 그 결과 가족사의 비극이 밝혀졌다.

지난 7월 5일 모스크바 교외 록 페스티벌에서 자폭한 체첸 소녀 줄리칸의 경우는 이복형제인 오빠가 사건 5개월 전에 차출한 경우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는 "아들을 저주한다"고 말했다.

록 페스티벌 다음날 모스크바의 한 카페에서 자폭하려다 잡힌 미수범 자레마는 남편이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숨진 경우다. 가난한 미망인의 삶은 처참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자립할 수 없으며, 자식은 시댁에 빼앗겨 얼굴도 못보며, 전쟁의 와중에 집도 절도 없다. 빚을 진 채 친척집의 가정부로 근근이 살아가던 자레마는 '빚을 갚아줄 테니 진정한 알라의 뜻을 따르라'는 친척의 제안을 받아들여 블랙 위도가 됐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사진 설명 전문>
허리에 자폭 공격용 폭탄을 찬 체첸 여성 반군(中)이 지난해 10월 모스크바의 돔 쿨트르이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눈만 내놓은 이슬람 전통 의상 차림이어서 남자 반군처럼 얼굴을 가리기 위해 스키 마스크를 쓸 필요도 없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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