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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에 정신적 유산 됐으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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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용중씨(74)는 전신이 예민한 촉수로 뒤덮여 있는 노인같다. 세상 어느 것 하나 그의 잔그물 같은 관심의 촉수를 벗어나 본 것은 없다. 그리고 그에게 닿으면 그의 대상이 무엇이 됐건 마치 리트머스지 반응시험에서나 보듯 정부와 시비가 가지런히 걸러져 나오는 것을 보고는 누구나 큰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만큼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연륜을 일흔 차례 이상이나 몸에 두른 노인에게 생각이 많다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겠는가.
거기서 그치지 않으니까 얘깃거리가 된다. 그는 쓴다. 평상인이라면 훌훌 흘려보내고 말 얽힌 생각의 실타래를 풀고 간추려 그걸 꼭 글로 쓴다. 그는 그게 역사라고 믿는다.
비록 인구에 회자될 만큼 이름을 떠올리지도 못했고 큰일을 이룬 바도 없지만 그는 양식 있는 평균적 부대인의 사고양식과 행동의 궤적을 글로 남긴다면 언젠가는 역사의 테두리 그림에나마 일조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소박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해서 책을 한 권 냈다. 『시간의 절벽에 서서』(월간여로사 발행). 다소 비장감이 감도는 제목의 이 책은 지난 85년 초부터 88년 말까지 4년 간에 걸쳐 틈틈이 쓴 글들을 묶은 것이다.
『시간 속에서는 영원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요. 사람의 한평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인가요.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어느 날 문득 해놓은 것도 하나 없이 마지막 벼랑까지 밀려와 섰다는 안타까움이 엄습했습니다. 얼마 주어져 있지 않은 시간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자, 물질로는 애시 당초 글렀으니 자식들에게 뜻 있는 정신적 유산이라도 하나 남겨놓고 죽자 그런 생각으로 이 책을 펴냈습니다.』
그의 말처럼 『시간의 절벽에 서서』란 이 책제목에는 삶의 막바지까지 쫓겨온 한 노인이 목숨이 마감할 날을 겨우 한뼘 정도 남겨놓고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절박함과 추억· 회오· 희원의 정서가 한 덩어리로 녹아있다.
김씨는 85년에도 자신의 얘기를 다룬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알의 씨앗』이란 책을 낸 일이 있는데 자전에 가까운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타자칭인 「그」를 내세워 썼다.
PR업자로 기업 일반의 바른 진로를 제시할 목적으로 쓴 책이어서 스스로를 객관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는 주관이 많이 들어갔다. 왕성한 독서체험을 반영해 종횡으로 인용문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글의 뼈대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 「내 겪음」이다.
그리고 꼿꼿한「내 시선과 잣대」로 사상을 재단했다.
우리시대의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온갖 부문을 싸잡아 안은 그의 성찰과 비판의 안목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매사를 그저 지나치지 않는 성격인 그는 자신의 사유의 덫에 치인 주제라면 무엇이고 내면에 곰삭이며 글로 썼다.
그렇게 2백자원고지 5천장을 메웠다. 주제를 잇고 끊고 하면서 거미처럼 글을 써 마침내 「시간에 떠밀러간 인간미생물의 마당굿 2백48장」이란 부제가 붙는 이번 책을 내놓았다.
『이 글을 쓴 85년부터 88년까지의 기간은 역사가 크게 뒤척이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하루하루 숨가쁘게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냘프게나마 희망을 갖고 글을 쓸 수 있었지만 88년 연말을 맞아 마침내 펜을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되풀이하여 더 써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의가 왔기 때문이지요.』
현실에 환멸을 느껴 마지막 펜을 놓으면서 그는『그러나 내일은 다시 태양이 뜰 것이기에 오늘을 산다』는 구절을 끝내 빼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신문을 보아도 큰 기사제목은 대충 넘겨버리고 1단짜리부터 꼼꼼히 새겨 읽는 괴벽을 가지고 있다. 일선기자들의 현장고발이나 취재낙수를 담은 「촛불」 따위의 작은 칼럼도 즐겨 읽는데 『간단한 글이지만 그 속에 시대의 모든 것이 응결돼있고 두고두고 씹을 맛을 주기 때문』이다. 잘된 글을 만나면 꼭 집필기자에게 편지를 보내 격려한다.
신문활자의 절반이나 될까싶은 깨알자로 『세 권으로 나눠 엮어야 할 것을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기가 싫어 한권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는 5백4O쪽의 이 방대한 책을 두고 그는 『기성세대에게는 반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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