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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10) 동국대 조사단의 일본 학술기행|북륙지방 곳곳에 "발해와 교류" 유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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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9면

동경에서의 체류기간은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끝나버렸다. 남은 일정도 다시 이틀간 교토(경도)·나라(나량)를 견학하는데 할애했다.
특히 나라는 동경박물관에서 본 헤이조쿄(평성경) 문물을 연상하면서 돌아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나라에서 견학한 여러 고적들을 짧은 글로서 표현하기란 어렵다. 그러니 개개의 소개는 그동안 소개된 책자나 글들에 넘기고, 전체적인 느낌만을 기술할까 한다.
고대 일본의 헤이조쿄가 자리했던 구역은 현재의 나라시가지를 제외하고는 넓은 지역이 전원으로 변해 있다.
시가지를 벗어난 전원지대에 나와보면 그 풍경이 너무나 정밀해 한때 찬란한 문화로 번창했던 인구20만의 도성이 자리했었던 곳이라고는 선뜻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한 감정이 생기기는 나라만이 아니라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부여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돌아본 인상을 짧게 표현하자면 고도로서의 분위기를 갈 살렸다기보다 너무 가꿔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시전체가 나라의 역사와 일본의 전통문화를 전시하기 위한 박물관으로 느껴졌다.

<너무 찰 가꾼 느낌>
일본사람들은 흔히 깔끔하고 반듯한 생활환경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가식을 피하고 가능한 한 자연에 의지하는 생활환경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금 양국의 생활문물들을 보면 외견상 형태가 거의 같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생활태도나 문화총체에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이 우리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고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고적을 돌아보고 이번 답사목적지인 호쿠리쿠(북륙)지방의 이시카와(석천) 현 가나자와(김택)에 도착한 것은 7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가나자와는 중세 이래로 유서 깊은 정치적·문화적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시카와 현립 역사박물관은 일제 때 구일본군 병기고로 사용했던 건물을 외형은 그대로 보존한 채 내부만을 진열실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전시된 유적들은 이 지방의 특징을 살려 중세와 근대개화기의 문물에 역점을 두었으며 한국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고대문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나자와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3일간 노도한토(능등반도)의 하구이(우작) 신사에서 시작, 해안도로를 따라게다(기다) 신사와 지게(사가)유적, 제염지, 본성사의 단산1호 고분, 그리고 후쿠라(복포)를 견학했다.
후쿠라에는 후쿠라노쓰(복량률)비가 있다. 이 비에 는『발해사절내항지박』이란 글귀의 비석을 세우게된 내력이 적혀있다.
발해는 고구려유민이 698년에 세운 나라로 926년 멸망했다. 발해가 신라와 왕래 기록은 별로 없는데 비해 일본과의 왕래기록은 많이 남아있다. 이는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발해는 멸망하기까지 약 2백년사이에 34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은 728년에서 811년까지 13차례 사신을 파견했다. 727년 9월21일 데와노구니(출우국) 해안에 발해의 선박 1척이 표착했다. 이 배에는 24명의 발해사절단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에미시(하이)라 불렸던 지방인에 의해 이들 중 사절대사였던 고인의를 비롯한 16명이 살해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듬해 1월 쇼무(성무) 천황을 가까스로 만나게 된다. 일본과 발해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부터 왕래가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일본은 신라만 아니라 발해를 통해서도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 통로는 일본해와 호쿠리쿠의 해안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연이 있기 때문에 호쿠리쿠지방 해안 여러 곳에 발해관계 유적이 많이 분포돼있다.

<7백27년 첫 인연>
일본해(우리나라 동해)에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처럼 돌출한 노도한토를 답사하면서 전방후 원분 외에도 방형분·원분이 많이 분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고분시대의 전기는 전방후원분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것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외형이 한반도의 묘제와 비슷해져 가는 현상이 보인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끌게 한 것은 나나오(칠미) 시도쿠다(덕전) 정에 있는 인나이초구시주가 (원내칙사총)고분과 노도시마마치(능등도정)에 있는 에조아나 (하이혈) 고분이다.
인나이초구시주가 고분은 호쿠리쿠 지방 최대의 방형분으로서 판축으로 된 이단의 방형봉분에 횡혈식석실을 구축한 형태다. 이 고분은 고구려나 백제의 묘형을 따르고 있다. 이것을 7세기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이민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에조아나 고분 역시 방형분이고 긴 연도가 있는 석실을 갖추고 있다. 석실은 웅혈 자혈이라 불리는 2개가 있고 T자형과 역L자형의 방형 평면석실로 되어 었다.
그리고 천정 가구는 아래목이 수직벽이고 위목이 말각조정식으로 좁혀지다가 판석을 덮은 양식이다. 석재는 판상의 절리가 있는 안산암이고, 횡전석을 쌓아 올리듯 벽면과 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긴 연도 중간쯤에 판우을 세워 칸막이 시설을 해두었다.
방형분에 말각조정식의 천정가구 방식이나 연도에 판석을 세워 칸막이 문을 갖춘 구조는 고구려 묘형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가야의 묘형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가야묘와도 닯아>
마지막으로 오다나카(소전중)의 신오주카(신왕총) 고분을 거쳐 국분사지를 답사했다. 신오주카고분은 직경 7Om나 되는 원형고분이고 수이진(숭신) 천황의 아들인 오이리기미고도(대입저명)의 묘라 해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곳은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중국제 삼각연신수경이 출토돼 유명하다.
가나자와에서 노도한토쪽의 답사를 마치고 이어 남서쪽의 후쿠이(복정) 쓰루가(돈하) 고하마(소빈) 와카사(야협) 일대의 고적을 답사했다.
답사대상은 신사와 고분이었다. 고분은 주로 전방후원분을 답사했다.
전방후도분을 많이 견학했으나 모두 수풀이 우거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었고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알아볼 정도다.
일본은 야요이(미생) 시대부터 아시아대륙과 한반도에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영향으로 매장방식도 높은 봉분을 쌓게되는 고총이 많다. 그런데 이 고총의 외형이 한반도나 중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인 전방후원분인 것이다.
지금까지외 연구로는 이러한 형태의 고분이 생기기 시작한 때를 3세기말이나 4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신라나 백제에서도 고총이 발달했던 때다. 즉 비슷한 시기에 고총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만 의형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 나타날 수 있었던 원인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명이 못되고 있다.
3세기이후 일본의 선진문물은 거의 한반도를 거쳐 들어갔고 그래서 한국문물과 많이 닮고 있다. 그러나 봉분의 형태만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우리는 물론, 일본에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색적인 형태라 할지라도 그것의 축조설계는 「귀화인」이라 불리는 한인기술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만은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규격이 고려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인솜씨" 인정?
고구려·백제·신라·일본에서 고총고분이 발생하게 되는 시기는 조금씩 다르다 할지라도 계급사회의 등장, 고대국가의 형성, 전제왕권의 출현 등 배경만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생존자들은 피장자의 진혼이나 사후생활의 안락을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사후에도 공동체의 수호령이나 조령으로서 후손들에게 작용해줄 것을 기대해서 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돌아보면서 필자는 그들의 고총이 개념상 대륙·한반도의 고총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외형에서 보듯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문화는 달라지며 따라서 당연히 문화총체도 달라진다는 것 또한 절감했다. 고총고분이 출현할 무렵의 일본지배계급은 해외문물을 수용하여 선진화하려 했지만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자 전방후원분처럼 그들의 욕구를 다른 방법으로 과시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것을 보았으나 짧은 시일에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보니 한일문화관계를 살핀다는 목적마저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게 됐다.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다만 일본 속의 한문화를 찾는다고 섣불리 뒤지고 다니다보면 자칫 우리 것이 흐려질 염려가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 이번 답사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 (끝)
윤용진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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