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의 여력(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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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사람들은 『「퇴임 카터」가 「재임 카터」보다 낫다』는 말들을 한다.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텐데 카터는 오히려 만족해하고 있다. 지난 87년 부인과 함께 집필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여생의 대부분을 위해』라는 저서에서 카터는 대통령을 물러난 뒤 『모든 것을 얻었다』고 했었다.
고향 플레인스 마을의 숲속 오솔길에서 자전차 바퀴에 바람 넣는 펌프질을 하고 있는 보통시민의 생활,뉴욕시의 브롱스와 필라델피아시의 교회기숙사에 묵으며 집없는 사람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파이버(안전모)를 쓰고 톱질과 대패질을 하며 가구를 만들고,때로는 이웃집 지붕에 올라가 슬레이트를 이어주는 목수의 생활,일요일이면 고향의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과 장년들을 상대로 성경강의를 하는 교사의 생활….
카터의 일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틀랜타시에 세워진 자신의 기념사업회 「2천년대 지구사」를 이끌며 제3세계 빈국들,수단,가나,탄자니아,에티오피아,짐바브웨 등을 돌아다니며 녹색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가나에선 『코끼리 눈알』만큼 크게 자란 옥수수알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최근엔 파나마와 니카라과 총선의 선거 감시인단으로 활약한 일도 있었다.
카터는 퇴임후 권력무상을 체험한 일도 있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장례식에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로 닉슨,포드와 함께 대통령 전용비행기를 얻어타고 갈때 카터의 좌석은 맨꽁무니 끝자리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예우가 그정도인 것에 몹시 당황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카터는 이때 비로서 권력의 단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퇴임재상이 재임재상 못지않게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정치인들을 서울에서도 보고 있다. 「전직 정부수반 협의회」(IAC)에 참여하고 있는 서독의 슈미트 전총리,프랑스 지스카르 전대통령,일본의 후쿠다 전총리. 이들은 자신의 국내외에서 평화의 조정자로 문필생활을 통해,혹은 행동가로 체험적이고 지적인 에너지를 불태우고 있다. 우리나라에 정치적 불행이 있다면 바로 그런 원로들이 드물다는 데도 있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재임시절의 에너지를 퇴임후에도 불태울 수 있는 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심산 아닌 우리의 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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