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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여인이 한인정신대 실상 폭로|〃미끼유인 정글서 학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본인의 입으로 일본인정신대 출신임을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한 여인이 태평양전쟁당시 종군 위안부로 끌려다니며 일본인 병사의 동물적 욕구대상이 됐던 한국인 정신대에 대한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나섰다.
『일본인 정신대 출신임을 밝히고 증언하는 사람은 생존자중 자신이 처음』 이라고 소개한 여인은 소위 「황군위안부」였던 시로타 스즈코씨(성전·가명·68)로 『남양군도 전선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히 짓밟힌 꽃다운 한국인 동료들의 원혼이라도 위로해야겠다는 뜻에서 오랜 악몽을 들춘다』고 했다.
일본 지바 (간섭) 현 다테야마시 매춘여성 갱생보호시설인 「키니테 부인츠망 에 수용돼 여생을 보내고 있는 시로타씨는 6일 이곳을 찾은 취재진에게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다시는 종군위안부라는, 비극의 길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태평양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고 밝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악몽을 지우려 하기보다는 용기를 갖고 일본군이 저지른 죄악을 세상에 폭로해야한다』 고 강조했다.
시로타씨는 18세 때인 1940년 대만의 한술집에서 일하다 위안부로 끌려가 사이판·남양군도 등지의 섬을, 전전하다 패전 직전 남양군도 도라크섬으로 가게됐으며 이곳에서 40여명의 한국여자들이 일본인범사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는 사실을 처음으로 목격하게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한국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일본군인 보초의 엄한 감시 속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일본군 범사들을 상대해야했으며 때로는 최전방부대를 순회하며 쉴새없이 몸을 팔았다』 고 말했다.
시로타씨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 위안부들에게는 이름대신 고유번호가 매겨져 상대할 여자의 번호표를 들고 위안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병사들은 자기차례가 오면 그야말로 반광란적인 학대를 하는 바람에 이를 견디다 못한 한국인 여성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겼다는 것.
그는 『특수간호부라는 이름으로 장교만을 상대했던 나도 계속되는 일에 상대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곤 했는데 하물며 사병들의 전유물이었던 한국여자들은 오죽했겠느냐』 며 『일본 위안부들사이에 「조센삐」로 불렀던 한국 여자들 가운데는 13∼14세 가량의 어린 나이에서부터 40대가 넘는 여자도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시로타씨는 『미군이 섬에 상륙하자 이른바 「천황의 군대」 라고 자부하던 일본군들은 자신들이 종군 위안부들에게 저지른 죄악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해 정글로 대피해 있던 한국위안부들을 귀국시켜주겠다고 속여 트럭에 태운 뒤 기관총을 쏘아 죽였는가 하면 정글 속에 남아있던 위안부들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도망갔다』 고 밝히고 당시 남양군도 파라오섬에서 미군 LST로 귀국길에 오른 자신은 귀국선도 못탄 채 정글 속에 버려진 한국여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지금도 가끔 생각하며 밤잠을 설치고 있다면서 『이들이 무사히 고국에 돌아가 살고 있기를 기도한다』 고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올해 나이 68세로 폐인에 가까운 노파로 변해버린 이 「여인」 은 『위안부로 끌려갔던 일본여성가운데 지금까지 자신의 과거를 공개한 일본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철저히 은폐돼 있던 종군위안부의 실상을 생생한 증언을 통해 폭로한산증인』 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귀국후 길거리를 전전하다 지난58년 동경의 한 갱생보호시설에 수용됐던 자신이 종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패전후 2O여년이 흐른 65년부터 였다고 했다.
그는 키니데 부인촌의 설립자인 후카즈 후미오(심률문웅)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를 소상히 고백하게 됐다.
【일다테야마(관산)=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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