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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동포 버려만 둘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2차대전 종전후 사실상 버려져왔던 사할린 억류동포들의 귀환과 전후처리문제가 최근 또다시 한일간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할린문제는 한일간에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으나 한일양국정부의 이해관계에 얽혀 완전히 매듭짓지못한 상태에서 한일국교정상화이후 억류동포들과 국내연고자들의 애절한 호소만 메아리지고 있다.
대구의 중소 이산가족회(회장 이두훈·53)에서는 때마침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일본의 침략전쟁에 따른 피해보상및 재일동포의 법적지위보장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있는 가운데 28일 영주귀국자및 사할린동포의 국내연고자등 2백여명이 모여 「고국에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할린 동포들의 귀환문제 해결과 영주귀국자의 권리회복」을 촉구하기로 했다.
88서울올림픽이후 한소간의 관계개선으로 귀국의 길이 열리면서 반세기만에 영주귀국한 동포는 그동안 42명.
올해도 50명내외의 동포들이 귀국할 컷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귀국이후 국내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각종질병에 시달리며 고령으로 노동력마저 상실, 문전걸식을 하다 숨지는등 한마디로 비참하기 이를데 없다.
8·15해방후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39만명은 물론 공동묘지의 일본인무덤까지 그들의 고국으로 이장해갔으나 일제에의해 강제징용된 한국인 6만여명은 종전된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제미아로 버려져 있다.
일본정부는 사할린억류동포들의 문제가 제기될때마다 『65년 한일국교 정상화때 전후처리가 모두 끝났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으나 사할린동포들은 물론 국내연고자 50여만명이 모두 이같은 일본의 입장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우리는 한일국교 정상화때 우리군사정부와 일본정부사이에 이루어진 밀약을 배상으로 보지않는다. 멀쩡한 우리동포들을 강제로 끌어다 개·돼지처럼 부려먹고 내팽개친뒤 얼마인지 알수없으나 돈으로 보상했다니 이게 문명세계에서 있을수 있는 일인가』
중소이산가족회 이회장의 이야기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일제말 이른바 「산업전사」라는 미명으로 강제징용돼 사할린에 끌려갔던 한국인은 줄잡아 15만명. 이가운데 약10만명이 1∼2년간의 강제노역후 한국으로 귀환했으나 나머지 4만여명은 사할린에서 일제패망을 맞았다.
47년12월말 사할린에 진주한 소련당국의 조사결과 사할린의 한국인은 모두 4만3천여명.
43년이 지난 현재는 이들 1세외에 2세와 3세까지 합쳐 6만명이상의 한국인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41년2월 결혼4년만에 부인과 두딸을 남겨두고 22세의 청년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지난1월 영주귀국한 백동기씨(71·경북달성군논공면상리)는 종전무렵인 44년4월 사할린의 코르사코프캠프에 끌려온 1천여명의 징용노무자중 20∼30대의 청장년은 불과 2백∼3백여명뿐이었고 나머지는 국교를 갓 졸업한 14∼15세의 청소년과 50∼60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고했다.
『우리가 사할린에 끌려갈때는 창씨개명을 시켜 일본이름을 쓰도록 법적으로 일본인을 만들어 놓고 패망하자 「한국인은 일본인이 아니다」며 자기들만 떠나고 말았다』고 백씨는 해방후 45년이 지난 지금도 치를 떨고 있다.
중소이산가족회는 75년5월25일 「사할린잔류자 귀환청구 재판실행위원회」를 구성, 일본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여 지난해6윌14일까지 14년동안 66회의 공판을 속개했으나 그동안 엄수갑씨등 사할린억류동포를 대표한 원고4명중 3명이 숨지고 유일한 생존자인 이덕림씨(76·경기도파주군파주읍봉암리)가 지난해2일 영주귀국함에 따라 그나마 실질적인 재판은 중단되고 말았다.
노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려지다시피 했던 사할린동포의 처리도 재고돼야만 할것이다. <대구=이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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