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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제4부<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교토의 7월은 장마와 더위로 얼룩져 있었다.
이와같은 우기철에 미술품을 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동국대대학원에 유학중인 재일교포 윤정남씨의 도움을 받아 먼저 히예산(비예산) 근처에 산재한 우리 고대미술의 자취를 찾아보기로 했다. 연락을 받은 윤씨는 많은 자료를 준비해놓고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으나 민속자료가 대부분이었다.
히예산기슭에 자리잡은 사찰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곳은 미데라(삼정사·일명 원성사)였다. 이곳은 목조의 신라명신좌상(높이 78cm)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대평십이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고려범종(1032년, 총길이 77.2cm)으로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신라 명신은 이 절 북원의 중심불당인 신라선신당의 본존으로 봉안돼있는 일종의 비불. 그 형태는 불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옛 할아버지 모습을 지닌 일종의 신상이다. 더구나 이는 약10세기경의 작품으로서 일본신상조각의 대표적 걸작에 속한다. 그러나 이 존상이 어떻게 하여 이 절에 안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찰측에서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사진이 신문에 소개되는 것조차 완강히 거절했다.
이 신상과 사찰은 필시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을터이지만 이를 알수없는 필자로서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길 수 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는 일길신사 서본궁의 경우 신체는 석가여래를 봉안하였으나 기도어가 일본으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한국어형식으로 변형된 언어라는 말까지 윤씨로부터 듣고보니 이곳 히예산 일대가 신불합일적 성격을 지닌 일본불교의 본거지인 동시에 우리고대문화의 저수지임을 확신할수 있었다.
우기철이니 비불이니 하며 공개를 거절하는 바람에 이곳의 정밀조사는 다시 후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우리 것을 가져다 놓고도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가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도어는 한국말>
임진왜란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왜인들에 의한 우리 중요문화재의 약탈은 아직까지 그 실상조차 알수 없는 실정이다.
문화재란 원래의 장소를 떠나서는 그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본래의 정신과 가치가 영원히 죽고 만다.
우리가 문화재의 현장 보존과 원형유지를 위해 각별한 신경을 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연지사의 범종 역시 외부에 공개를 꺼리는 것중 하나였는데 운이 좋아 직접 볼수 있었다. 교토의 불교대학박사과정에 유학중인 진기스님이 협조해주어 범종조사승낙을 쉽게 받아냈기 때문이다.
범종조사를 위해 후쿠이(복정)로 가는 전차에서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마치 오랜 소원이 성취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이 신라범종은 본래 경남진주의 연지사에 소장돼 있다가 임란을 전후하는 시기에 탈취당하여 먼 이국 일본땅으로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몇해전 진주에서 연지사지를 조사한뒤로는 줄곧 이 범종을 조사하고싶다는 생각을 품어왔었다.
연지사는 원래 진주시내의 진산에 해당하는 비봉산 아래 구법원지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패망한 절이 되고 말았다.
한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쓰루가(돈하)에서는 전차를 버리고 택시를 탔다. 한적한 오솔길을 벗어나 해안도로를 따라 약15분을 달린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송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쓸쓸한 해안, 즉 쓰루가의 마쓰하라(송원)촌 조구진자 (상궁신사)였다.
신사는 바다에 바로 인접해 있었는데 이 쓰루가항은 김만철씨일가가 북으로부터 귀순한 항구이기도해 더욱 야릇한 기분에 젖게 했다.
신사에 들어가 사람을 찾았더니 신사의 관리인 부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 말고 낯선 방문객을 맞이해 주었다.
범종은 바닷가의 해풍과 염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지어 보존되고 있었으나 생각외로 손상이 심한 편이었다. 보호각의 문을 열었더니 새끼로 쳐놓은 금줄이 있어 이 유물을 신성시하고 있음을 알수있었다. 관리인 부부는 문을 따주고는 곧장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갔으므로 호기를 만난 우리들은 자세히 이 범종을 조사할수 있었다.
보호각내에는 거미줄과 먼지가 엉켜 있었으나 종신에 양각된 명문을 판독키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과거 일제시대 판독된 것을 여러 자(자) 보완하여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먼저 종신은 전체 높이가 1백11cm에 밑지름이 66.7cm로 용두와 상하대, 유곽, 당좌등이 신라종의 형식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

<상원사 범종 비슷>
한마리 용(단용)의 형식을 지닌 용두는 신라이래 고수해 온 우리 범종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며, 유곽의 돌기된 유두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의 형식을 따랐다. 특히 네곳에 배치된 유곽은 본래 각처에 9개씩 조성되어 도합 36개가 원칙이나 많이 남은 곳이 7개, 심지어 1∼2개만 남은 곳도 있어 현재는 모두 12개만 남아있었다. 이는 범종 탈취당시 무리하게 굴리다가 입힌 상처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종신의 문양대는 유곽에 보상화문을 돌렸고 상하대에는 물결무늬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형식이 치졸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또한 종신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전후 2개소에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잎이 8개인 2중 연꽃무늬로 구성되었다. 또 당좌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주악비천 2구가 앞뒤로 마주 대하고 있어 이 종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비천상은 천의를 허공에 휘날리면서 양손으로는 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이다.
장구의 형태가 현대의 것과는 달라 고악기연구에 참고가 될 것으로 보였다.
이 범종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대 아래 유곽 사이에 1백18자에 달하는 장문의 명문이 있다는 점이다.
명문은 범종을 만든 연대와 소속사원명과 범종의 입금무게, 그리고 법종조성에 관계되었던 인명과 직위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성전 혜문법사』『황룡사 각명화상』등은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중요인물로 짐작되며 또한 이두가 범행하는 것도 주목된다. 판독된 명문은 다음과 같다.
태화칠연삼월일청주연지사, 종성내절전합입금칠백십삼정, 고금사백구십팔정가입금백십정성전화상 혜문법사 유계게법사, 상좌칙충법사 도내법매법사, 향촌주 삼장척간 주작태?, 작보지 보청군사 용쇄군사, 사육 삼충사지 행도사지, 성박사 안해애대사 애인대사, 절주갱 황룡사 각명화상.
태화칠년은 신라 흥덕왕 8년(서기 833년)으로 이해에 종이 완성돼 진주의 연지사에 봉납되었다고 짐작된다.

<해풍으로 녹슬어>
현재까지 일본에 반출된 신라 범종은 7개로 확인됐으나 이들 가운데 2개는 망실되었다. 따라서 연지사의 종이 남아있는 최고의 신라범종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는 막중하다.
또한 종의 양식은 일본종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용두의 한마리 용과 함께 음통을 지니고 있다든가 유곽과 당좌등의 형식이 신라종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형태 역시 명문의 연대와 일치하는 우리 고대 금석공예의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이 종이 언제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멀고 먼 이곳까지 뫘는지는 알수 없으나 일본인들의 문화적 열등감이 곧 대륙의 문물을 약탈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짐작컨대 이 종은 임진왜란, 또는 정유재란 당시 사찰로부터 탈취돼 진주와 이웃한 사천 앞바다에서 뱃길을 따라 이곳 쓰루가 해안에 위치한 조구진자에 봉납되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이 종은 용두를 비롯한 종신 전체에 아름다운 청동녹소가 곱게 피어났다.
이는 분명 해풍으로 인한 염분의 피해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곳에서 분명히 해야할것은 이 아름다운 신라범종을 이대로 더 이상 방치해둔다면 해풍으로 인한 소위 청동병이 더욱 가속화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돌이킬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탈취된 문화재에 대한 또 한번의 범죄행위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장충식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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