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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ㆍ중국인/박병석 전홍콩특파원의 「대륙기행」: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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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돈 문제는 부자간도 “남남”/거래엔 친분등 「관계망」이 중요/한국과 교역도 평소 친한 홍콩상 통해/물건 살땐 3곳 이상서 품질ㆍ가격조사
지난해 홍콩의 한 한국 상사가 지점 확장 및 이전 기념파티에 참가한 중국인들에게 기념품으로 탁상 시계를 주어 중국인들의 실소를 자아낸 일이 있다.
중국인들은 탁상 시계를 선물 한다는 「송종」이라는 말과 장례를 치른다는 의미를 지닌 「송종」의 발음이 거의 같기 때문에 이 같은 선물을 하지 않는 것을 오랜 관습으로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지방마다 상술 달라
이 같은 사례는 비록 사소한 것 같지만 대중 비즈니스 전초 기지로 나온 우리 기업이 중국인의 기본적인 관습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수 없다.
88년을 고비로 한중 양국간 교역액이 30억 달러를 넘어섰으나 아직 「직접 상담,직접 계약」방식보다는 홍콩의 중개상을 통해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규모가 큰 거래를 중국인들과 직접 계약하는 것은 한중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험 부담이 크다는 측면도 있지만 우리의 대중 비즈니스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중국인들의 상술이나 비즈니스 기질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책자는 중국인 스스로 집필한 것도 있고 일본인들이 쓴 책도 적지 않지만 아직 한국에는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없다.
중국은 워낙 땅이 넓고 인구도 많은 국가여서 지방에 따라 기질ㆍ풍속ㆍ언어ㆍ습관 등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방마다 비즈니스 기질이나 상술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인이 펴낸 책에도 금전 관계에서는 부자ㆍ형제간에도 타인이며 이같은 금전관계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켜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예부터 「화비삼가」
신용카드가 대만이나 중국에서 잘 활용되지 않는 것은 경제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신용카드의 사용이 금전 감각을 마비 시키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중국에는 예부터 「화비삼가」라는 말이있다. 이는 물품을 선정할 때는 세곳 이상의 상대에게 품질이나 가격 조건등을 비교 하라는 말이다. 또 물건을 대량 구입 하려는 사람은 그만한 재력이 있으니 오히려 비싼 값을 부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인의 상술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값 비싸도 간접무역
중국과 거래를 하는 한국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중의 하나가 같은 중국 수입상이 똑같은 한국 상품을 수입하면서 싼 값을 제시하는 한국 상사로 부터 직접 구입하지 않고 수수료가 붙어 오히려 값이 비싼 홍콩의 중개상을 통해 수입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 수입상과 홍콩 중개상 사이에 맺어진 끈끈한 「관계」때문이다. 물론 이 관계는 서로 상대방을 잘 알수 없는 한국 상사보다는 오랜 거래를 해와 서로 통하는 중국인(홍콩인)을 통해야 말썽의 소지없이 뒷돈을 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 역할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은 이미 「관계」를 맺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이 「관계」란 말은 비단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중국인 사회를 이해 하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행ㆍ외행 구별도
중국어에서 내와 외가 갖는 단어가 많고 이는 바로 관계의 친소를 뜻하기도 하는데 내국인과 외국인,내행(전문가)과 외행(비전문가)등의 구별도 그러한 예다.
중국인들과의 비즈니스는 이 관계를 이해하고 그들의 「관계망」에 접근하고 파고 들어야 가능한 것이다.
「관계망」은 크게 ▲「인친관계」(혈연 및 혼인관계) ▲「노향ㆍ동학관계」(동향이나 동창 선후배 관계) ▲「매매관계」(금전ㆍ물질에 의한 사리관계) ▲「노전우ㆍ부하ㆍ상급관계」(군계통의 연줄) ▲파벌관계(문화 혁명기 등에 형성된 파벌)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러한 관계는 직책이나 신분등으로 봐서 전혀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굵직한 일을 처리해내는 비결이기도 하고 매스컴이 엄격히 통제된 중국에서 중요한 소식이 흘러나와 유포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관계 활용 여부에 따라 「사배공반」이 되기도 하고 「사반공배」가 되기도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한다.
규정이나 법률 및 관련 정책등 공식적인 통로만을 통하고 혈연ㆍ지연등 인맥과 연줄을 도외시 하고서는 비즈니스등 각종 교섭이 자주 벽에 부딪치게 된다.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서는 실권자를 정확히 파악해 연줄을 찾아 친분 관계를 조성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무 담당자를 무시하거나 「체면」(면자)을 손상 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PN JAD
PD 19900420
PG 05
PQ 02
CP HS
CK 05
CS A11
BL 2179
GO 환상의터널그시작과끝
GI 박갑동
TI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94
TX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남파첩자 정부각기관 침투/정보책 윤모가 간첩명부 묻어둔 약도 전달
유축운은 이날 해방일보 편집국 세포회의에는 출석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지시로 동대문 밖 「오모」라는 자를 검열한 보고서를 제출한 후부터 그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는 해방일보 세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후 그는 38선을 넘어 서울∼평양간을 왔다갔다한 것 같았다.
김일성의 서울 공산당 파괴 침투 공작을 박헌영은 막아낼 필요가 있었고 나의 추측이지만 유축운은 당방위 공작에 동원된것 같았다.
그는 49년 봄에 다시 우리부서에 돌아와 나의 상부로서 같이 활동 하다가 그해 가을에 경찰에 체포 되었고 그의 자리를 내가 물려받게 되었다.
공산당 중앙 기본 조직에는 군사부라든지 정보부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군사 프락치 사건이 폭로됨으로써 군사부라는 것이 존재 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정보부라는 것은 6ㆍ25때 까지는 그 존재를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6ㆍ25후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실로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최후의 지하총책 박갑동선생 이십니까』하며 나를 확인한후 자기는 정보책 윤모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봤다.
고급 양복을 입고 몸매는 단정하며 성실한 기업가 같이 보였다. 자기는 46년 여름 김일성이 우리당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공작해올때 김삼룡 동지의 특명으로 우리당을 방위하기 위해 특별 정보 기관을 조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김삼룡이 충청도 사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박헌영의 처가가 윤씨니 그 관계인지 하여간 박헌영ㆍ김삼룡과 개인 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추측되었다. 같은 김삼룡계로 최고 간부중 한사람 이면서도 같은 충청도 사람인 정태식도 모르고 있었다.
박헌영ㆍ김삼룡 두사람 밖에 모르는 비밀조직이 남로당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며 일방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의 마음을 먼저 알아챘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때 제주로 이사가 해방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와 박헌영의 외가쪽 아저씨와 친한 관계였으므로 해방후 서울에 돌아와서 박헌영을 알게 되었고 김삼룡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김삼룡의 직접 지시로 만주와 이북에서 월남해 미군정의 각 기관에 들어가 반공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분조사,즉 신원 조사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주의 조선인 고급관리ㆍ조선 독립 운동가들을 직접 체포한 헌병ㆍ고등계 경찰,또 이들을 직접 기소해 중형을 언도한 검사ㆍ판사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일제 식민정책에 적극 협력한 그들 민족 반역자들 대부분은 소련군에 체포되어 평양의 제 5호실에 이관 되었다고 했다.
제 5호실에서는 그들을 훈련 시키고 서약서를 받고는 이남으로 파송해 미군정에 침투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ㆍ만주국 시대에도 반공투사이니 미군정에서는 안심하고 채용한것 같았다는 것이다.
제 5호실은 이북에서 체포한 헌병ㆍ고등계 경찰관에게도 이러한 방법을 썼다는 것이었다. 나는 윤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4년전에 있었던 오모 사건이 생각났다.
『혹시 유축운이라는 사람 아십니까』하고 나는 물어봤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우리 조직에는 없었습니다』하고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그때 유축운이 우리 해방일보 세포에서 떨어져 평양을 왕복하며 그런 일을 조사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조직내에서는 전부 다 가명을 쓰고 있었고 이 윤이란 성도 가명인가 싶었다. 윤과 이야기 하고 있을 때는 이미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복간 해방일보는 시청 바로뒤 해방전 경성일보 사옥자리에 있었다.
윤의 절망적인 심정은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저는 유엔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이북에도 못갑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왜요.』나는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김일성이 박헌영 선생과 남로당과 남조선인민ㆍ대한민국을 송두리째 없애려고 하는 것을 내가 막고 있는데 나를 살려두겠어요.』
유엔군의 폭격과 포성은 그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의 대화는 2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는 최후로 나에게 바둑돌만한 것을 건네 주었다. 『이것은 김일성이 한국정부 각기관에 침투시킨 간첩 제 5열의 명부를 파묻은 장소의 약도입니다. 김삼룡 선생은 죽었고 최후의 지하 총책이었던 박선생님께 전달 합니다』라면서 그는 흐느껴 울었다.PN JAD
PD 19900420
PG 05
PQ 03
CP HS
SA P
CK 07
CS A09
BL 986
GI 조현욱
TI 이원경대사가 말하는 「재일한국인협상」/“일정부 소극적태도로 난항”
TX ◎대통령 방일과 연계할일 못된다
『한일간에 현안이 되고 있는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문제는 어느 한쪽이 완전한 만족을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노태우 대통령의 5월말 방일을 앞두고 정부와 업무 협의차 일시 귀국한 이원경 주일 대사는 19일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재일 한국인 법적지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음을 시인했다.
­협상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과거 문제를 갖고 있는 사항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일 관계에 미래지향적 진전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최상의 결과가 나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3세 문제의 타결을 대통령의 방일과 연계시키지 않기로 정부가 최근 방침을 변경한 경위는 어떤가.
『대통령의 방일 연계문제는 일부 과대 표현됐다고 본다. 방일과 3세의 법적지위 문제는 둘다 중요한 것으로서 이를 연계시킨다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 정부내 부처간에도 상당한 이견이 있는데다 최근 일본측 입장이 강성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으로 보도 되고 있는데.
『일본정계내 계파나 부처간에 합의를 끌어낼 수 없는 경우에는 내각 전체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될때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주권을 3세이하 후손 전후가 아니라 3세에게만 준다는 일본측 보도가 사실 인가.
『3세이후 자손에게 영주권을 준다는 것은 양국 정부간에 일단 합의한 사항이다. 최종 협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협정 영주권 부여 대상을 「일본과 특수 관계에 있는 모든 한국인 3세 이하에서」「협정 영주권자의 3세」만으로 축소한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포기한 것 아닌가.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다. 그러나 협정 영주권자가 아닌 사람들도 특례 영주권이나 일반 영주권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상황은 일단 계속되는 것이다.』
­대통령 방일의 의의는.
『한일 양국이 상호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미래 지향적으로 새로운 협력 관계를 개척해 나간다는 시각에서 추진 되고 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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