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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9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김일성 「5호실」서 대남공작/평양의 극비부서… 서울 공산당 파괴 지휘
『제5호실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하며 유축운이 물었다.
나는 『제5호실이란 것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김일성이 제5호실 공작원을 시켜 서울의 우리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쳐부수라고 지시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고 대답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러시아혁명때 수십만명의 러시아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싫다고 해외로 망명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을 백계러시아인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속에 소련에서 첩자를 끼어보내 지금 전세계에 정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서도 그 반공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간첩이라 하여 많이 체포했지요. 참으로 무서운 일이오』하며 그는 내가 찾아가야 할 집의 약도를 설명해 주었다.
내가 찾아갈 집은 동대문에서 신설동으로 가는 왼편 산언덕에 있었다.
나는 이튿날 그 집을 찾아 갔다. 그곳은 빈민동네였다. 나는 그 집을 찾고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자세히 정찰해 놓고 만일의 경우에는 탈출할 경로까지 다 생각해 놓은후 문을 두드렸다.
『오선생 계십니까』하고 암호를 불렀다. 그 쪽에서 『누구 십니까』하고 묻는 말이 들려왔다. 『저 청진에서 온 김입니다』고 하니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만한 방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신체가 건장하고 힘깨나 쓸만한 20세 전후의 청년이 있었다. 얼굴도 잘 생겼다. 경상도말과 함경도말은 비슷하기 때문에 나도 청진 포항동에서 나서 일제때부터 서울에 와서 산다고 인사를 했다.
『유선생이 오늘 나를 동무에게 보낸 것은 그 의미를 동무도 잘 알고 있겠지요. 김일성 동지가 어떠한 짓을 하든 우리는 그에 대항해 나갈 방책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말고 진실을 나에게 다 이야기해 주시오. 우리당은 동무를 구할 만반의 대책을 다 강구해 놓고 있다』면서 나는 그를 우선 안심시키려 했다. 그는 꿇어않아 공손한 태도로 나의 말을 들었다. 얼굴에는 아직 어린티가 남아 있었다.
『우리당은 월남동포들에 대해 동정하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소. 인간은 원래 사상보다 먹고 사는 생활이 더 중요합니다. 평양 공산당에 생활의 터전을 뺏기고 선조 대대의 집과 토지와 직업을 뺏기고 야밤에 고향을 탈출해야했던 월남 동포들의 심정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말에 눈이 둥그래졌다. 『선생님은 공산당을 마구 쳐부수려는 월남 동포들을 미워하지 않습니까』고 물었다.
『왜 미워해요. 그들은 소련군과 김일성동지의 극좌주의와 소련화 정책의 희생자들이고 우리는 미군정과 이승만ㆍ한민당의 희생자인데. 우리들은 반드시 서로 손잡을 때가 올 것입니다.』
『저도 이북사람이지만 참 안타까워요. 김일성에게 뺨맞고 이남의 공산주의자에게 원한을 갚으려하니…. 저는 그것을 선동할 임무를 띠고 왔으니 더 나쁘지만….』하며 그자신의 정체를 차차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해 1월말에 갑자기 평양에 소환되어 갔다. 당본부에 등용될 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평양으로 갔다고 했다. 그가 간곳은 당내 극비 부서인 제5호실 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선 청진에 다시 돌아가 공금4백원을 훔친뒤 보안기관에 절대 잡히지 않게 평양으로 다시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대로 실천하여 평양의 제5호실로 찾아가니 『좋소! 잘 됐소. 동무는 함경북도 뿐만아니라 전국 보안기관에 지명수배 되었소. 죄명은 공금을 절취하여 남조선으로 탈출을 기도한 죄명이오. 오늘부터 시내에 나가면 동무는 당장 체포되오. 그러면 우리는 동무를 구할 수가 없소. 여기서 지정한 초대소에 숨어 있어야 하오』하며 외출을 금지시키고 그로부터 3개월동안 대남공작의 특수훈련을 시키더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점점 핵심부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도 그의 말에 쏠려 『뭐 첩보활동 이었어요』하고 긴장했다.
『아닙니다. 이북에서 공산주의가 싫어서 공금을 훔쳐가지고 왔다고 구체적 증거를 대고 서울에 가서 월남동포들의 반공단체에 가담하여 공산당 타도공작의 선두에 서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실적을 올리라는 것입니다. 반공투사로서 직위를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울의 우리 공산당중앙을 파괴타도하라는 것입니까.』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확인해 봤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킨대로 하다보니 제 양심상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고향 선배인 유축운 선생님께 사정 이야기를 해 이 더러운 일에서 발을 빼게 해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나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동무 이야기가 도대체 믿어지지 않아요』라며 고개를 내흔들었다.
『저도 처음 지시를 받을때에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하고 그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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