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와 따로 노는 「밀실정치」/노재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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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구서갑구 정호용후보의 사퇴파동을 지켜보면서 여러가지 점에서 착잡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들의 행태와 선거자체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대구 보궐선거는 선거시기와 유력한 후보들의 경력상 특성때문에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압책임문제,3당 합당의 정당성시비,경제위기의 책임소재 등 과거와 현재의 주된 쟁점들이 유세과정에서 한꺼번에 쏟아질 소지가 많았다.
게다가 대리전이니,TK목장의 결투니 해서 선거구밖의 국민들도 여간 관심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 첫 유세일인 25일 서울에 가 대통령을 만나고 왔다는 정후보가 느닷없이 사퇴의사를 내비추고 유세에도 불참했다.
알고보니 후보등록 직전인 지난 15일에도 대통령을 만난 뒤 한때 등록포기를 고려했다니까 느닷없는 일이 아니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퇴 운운하는 소식에 정씨의 여비서가 기절하고 흥분한 선거운동원이 기자회견장의 탁자까지 둘러 엎었을 정도였으니 정후보가 일반유권자는 물론 선거운동원들에게도 사전에 의사를 타진해 보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
자의로 후보직을 사퇴하는 것이야 정씨의 자유다. 문제는 사퇴의 과정이다.
『대구시민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출마했다』던 정씨가 시민 아닌 대통령과의 밀담을 거쳐 후보직을 사퇴했으니 당초부터 유권자의 명예나 자존심은 정씨의 출마,당선여부와 상관없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결국 5공청산이든,3당합당이든간에 중요하고 어려운 사안일수록 밀실에서 처리되는 정치관행이 또한번 되풀이된 것이다.
이쯤되면 『문희갑후보가 당선돼야 정국이 안정된다』 『문후보는 대통령의 분신이다』고 공언해온 민자당측의 논리도 혹시 민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문후보가 정씨의 사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하더라도 소속당의 총수인 노대통령이 정씨를 사퇴시킴으로써 당선된다면 그의 승리는 호가호위라는 비아냥은 면할 수 없게 됐다.
또 대통령직이 한낱 지역구의 보궐선거에 끼어들어 사퇴를 권유하고 개인적 우정에 호소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자리라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우리 정치가 하루빨리 자의ㆍ타의도,우의ㆍ마의도 아닌 「민의」에 호소하고 그에 따라 결정되는 때가 오기를 학수고대한다.<대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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