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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다시 출발! 시속 330km 고속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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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방식을 바꾼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때 '폭주족의 대부'로 통했던 이맹근(47)씨. 그는 지금 정식 레이서 겸 아마추어자동차경주대회 프로모터입니다. 그보다 스물일곱 살 어린 김태현(20.킥스 레이스팀)씨. 지난해까지만해도 소문난 폭주광이던 그 역시, 이제 전도유망한 프로 레이서입니다. 차에 꽂혀, 스피드에 미쳐 오직 달리는 것으로 생의 존재 증명을 해 온 두 남자. 익명성에 갇힌 폭주족에서 제 한 이름 걸고 싸우는 진짜 사나이로 거듭나기까지 시속 330㎞로 고속 주행해 온 그들을 만났습니다.

글=강인식 기자<kangi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왕년의 폭주족 대부 이맹근

# 비행기보다 빠르게

이맹근씨는 '드래그 레이스'(양산차 부문) 한국 최고 기록 보유자다. 드래그(Drag)는 육상으로 치면 100m 스프린트 경기다. 보통 400m를 달려 주행 시간으로 승부를 가린다. 이씨의 공식 최고 기록은 지난해 작성한 9초498이다. 세계자동차연맹(FIA)이 인정한 기록이다. 하지만 그에겐 더 빨리 달린 기억이 있다. 2004년 3월 일본 센다이 '하이랜드 드래그 웨이'에서 400m를 8초889에 주파했다. 세계기록 8초670에 조금 못미치는 비공인 세계 2위 기록이다.

"비행기도 땅에 바퀴를 대고는 저보다 빠를 수 없습니다."

적어도 400m까지, 그의 말은 진실이다.

# 자칭 '한밤의 기사들'

그의 아버지는 박정희 시대 고위 관료였다. 집에는 관용차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모형 자동차 엔진을 사다 줬다. 며칠이 걸려 조립에 성공했다. "자신이 붙었나 봐요. 차고로 달려가 관용차 엔진을 분해하기 시작했죠."

그러나 다시 조립할 순 없었다. 늦은 밤까지 끙끙대던 소년은 끝내 울었다. 차고에서 소년을 발견한 부모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여보, 우리 애 이과 보내야겠어요."

1978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데모 꽤나 하며 청춘을 보냈다. 정권이 무너지고, 집안도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84년 군 제대 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했다. 해방구를 찾았다. 폭주였다. 얼마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유산을 탈탈 털어 주유소 경영을 시작했다. 장사가 제법 됐다. 돈을 모았고, 더 좋은 차를 샀고, 더 빨리 달렸다. 80년대까지 홀로 달리던 그에게 동료들이 나타났다. 90년대 활성화한 PC통신 덕분이었다.

"온라인 동호회를 만든 거죠. 모임에 나가 보니 저보다 10살 정도는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자연스럽게 '큰 형님'이 됐죠."

그는 '폭주족의 대부'가 됐다. 그의 영문 이니셜과 같은 'MK(Midnight Knights ; 한밤의 기사들)'라는 이름의 드라이브 동호회를 이끌며 그 세계를 주름잡았다.

식물인간이 된 후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삶이 바뀌었다

# 폭주와 결별

99년 처음으로 정규 레이스에 참가했다. "폭주를 그만뒀다기보다 대회가 생겼다기에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거죠."

데뷔하자마자 드래그 레이스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 2위를 다퉜다. 레이서로 명성을 얻은 만큼 폭주는 그만두려 했다. 쉽지 않았다. "중독된 거죠. 벗어나기 힘들었어요."

2003년 여름 후배가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속 250km로 내달리다 갑자기 끼어든 트럭 밑으로 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들어갔다고 했다. 후배는 식물인간이 됐다.

"병원에서 걜 봤어요. 초점 잃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더군요."

그도 96년 고속도로를 달리다 후배와 똑같은 추돌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왼쪽 새끼손가락이 한 마디나 잘려나갔다. 짧은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그는 당시 사고를 생각했다. 후배의 눈을 보고 또 봤다. 그날 이후 그는 고속도로 폭주를 끊었다. 삶이 바뀐 것이다.

"아니, 한 번 더 있네요. 딱 한 번이오."

2004년 일본에서였다. 자신의 애마 '닛산 스카이라인 GT-R'을 몰고 규슈 가고시마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에게 똑같은 기종의 차가 접근했다. 일본 폭주족 같았다. 피하고 보자 싶어 시속 320km로 달렸다. 갑자기 눈앞에 '80km 속도 제한' 표지판이 튀어나왔다. 차를 멈췄다. 뒤따라오던 차가 그의 차를 가로막고 섰다. 차에서 '갓길로 차를 대시오'라는 전광판 글씨가 튀어나왔다. '후쿠멘 패트롤'이었다. "후쿠멘은 '복면'입니다. '암행 경찰'이죠. 최고의 스포츠카로 무장하고 고속도로에서 폭주족을 잡는 겁니다."

사정을 얘기해 경고 조치만 받고 풀려났다. 그게 진짜 마지막이었다.

# 이름을 걸고 달려라

그의 레이스 철학은 간단하다. '이름을 걸고 달리라'는 것이다. "폭주에는 익명성이 깔려 있어요. 마치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네티즌처럼 그들도 앞만 보고 마구 달리는 거죠. 그 희열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자기 이름을 걸고 나간 대회에서 우승하는 성취감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행복감을 알리고 싶어요."

그는 자신이 프로모션하는 자동차경주대회를 위해 올해만 4억 원을 썼다. "아직은 외롭지만 일단 사람들이 레이싱의 묘미를 알게 되면 스폰서도, 방송국도 달라붙을 겁니다. 그러려면 스타가 필요해요. 우리나라에도 재능 있는 언더그라운드 드라이버가 많습니다. 그들을 정규 레이스로 끌어들여 스타로 키우는 게 급선무죠."

◆ 레이싱계 신형 엔진 김태현

"작년까진 양아치 … 이젠 꿈이 생겼어요"

# 바로 그 아이

"김태현이다, 김태현"

경기가 있는 날 경기도 용인 스피드웨이 레이스 트랙 주변을 걷다 보면 이런 수군거림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이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해요. 아니, 알아봐 준달까요."

김태현씨는 아직 그런 시선이 쑥스러운 '신참 레이서'다. 올 2월 정규 레이스에 입문했다. 하지만 성적은 놀랍다. 데뷔전이던 3월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 다음엔 2위, 그 다음은 또 우승이었다. 데뷔 석 달 만에 프로팀의 영입 제의를 받았다. 킥스 레이스팀 소속의 프로 선수가 됐다.

"보면 볼수록 놀라워요. 남들 4년 갈 길을 4개월 만에 갔으니까." 이맹근씨 말이다. "프로모터 일만도 바쁘지만 어떻게든 시간 빼서 이 녀석과 한판 떠야죠." 태현씨는 맹근씨가 오랫동안 찾아온 '바로 그 아이'다. 폭주에 미쳐 있던 녀석이 정규 레이스에서 스타가 된, 바로 그런 예 말이다.

"저요? 레이스 시작하기 전에는 그냥 불량품이었죠 뭐." 청소년 시절, 태현씨는 뭘 해도 되는 게 없었다. "공부가 안 돼서 운동을 했는데 그것도 별 볼 일 없었어요." 학교 안 가기를 밥 먹듯 했다. 가출도 했고 자퇴하겠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집착한 게 있다면 오직 하나, 오토바이뿐이었다. "문제아와 오토바이. 대충 상상이 가시죠?"

고교 1학년,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큰 사고를 당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머릿속에 아직 실리콘이랑 철심이 들어 있어요." 제대로 달리려면 자동차를 타야겠다 싶었다. "운전면허는 만 18세가 돼야 딸 수 있잖아요. 제 생일이 4월 24일인데, 고3이던 2004년 4월 28일에 운전면허증을 받았어요."

아버지를 졸라 차를 샀다. '좀 달리는 애들'이 죄 모인다는 뚝섬으로 갔다. "양아치들 차 아시죠? 자동차 라이트에 '앤젤 아이(램프 장식의 일종)' 박고, 날개 달고, 스티커 붙이고, 머플러 만져 소리 키우고."

지난 1년은 내내 그런 생활이었다. 그러다 퍼뜩,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역주행하고, 일반 차량 앞으로 끼어들어 놀라게 하고, 경찰 자극하며 놀리고…. 그런 일이 많았어요. '뚝섬 양아치'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 스무 살의 포부

달라져야겠다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또한 그 무엇보다 극한까지 달리고 싶었다. 차 개조를 위해 튜닝 업체를 찾았다. 그곳에서 튜닝 전문가 신윤재씨를 만났다. "제가 타는 걸 한번 보시더니 '재능 있다'고 하시더군요."

재능 있다? 그 말에 꿈틀했다. "부모님께 정식으로 허락을 받으라며, 제 손을 잡아끌어 아버지께 데려가더군요." 아버지의 처음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누가 상상했을까. 며칠 뒤 이번엔 아버지가 신씨를 찾았다. "부족한 자식 놈 잘 가르쳐 달라시더군요. 감사했어요." 그렇게 데뷔한 그는 이제 레이싱계에서 '신형 엔진'이라는 멋진 별명까지 얻어가졌다. 식구들도 좋아한다. 그의 어머니는 "뭘 해도 열심히 못 할 아이라 생각했다"며 "요즘엔 애 눈에 생기가 돈다. 살 것 같다"고 했다.

태현씨도 살맛이 난다. "폭주족 바닥에서 잘하는 건요, 뭐랄까, 그건 중학교 때 '쌈짱'이랑 비슷한 거예요. 하지만 정규 레이싱은 다르거든요. 스폰서가 있고 감독이 있고 팬들이 있어요. 내 몸이 귀하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됐고요."

계획도 세웠다. "일단 한국 프로리그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요. 다음엔 일본 최고 무대인 수퍼GT에 출전하고 싶어요. 물론 세계 10개 도시에서 열리는 D1그랑프리(드리프트 최고 권위 대회)에도 죄다 참가하고 싶고요."

바람도 있다. "정말 잘해서 누군가에게 꿈을 주는 거요. '김태현을 보고 레이서가 됐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제 진짜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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