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장하성 펀드'의 의도와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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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투자고문으로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KCGF)가 얼마 전 대한화섬 주식 5.15%를 매입했다. 장 교수는 대한화섬 지분을 매입한 이유에 대해 "주가가 순자산가치의 5분의 1에 불과하고,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화섬이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주가가 오를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뒤 대한화섬 주가는 두 배로 뛰었다.

장 교수의 진실성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그는 10여 년간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재벌의 지배구조와 경영행태를 비판해온 대표적 시민운동가다. 그동안 소액지분으로 기업에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엔 한계를 느꼈을 터이고, 주요 주주 입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소신을 펴기 위해 새로운 실험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도가 순수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세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익을 추구하는 펀드와, 공익성이 우선인 시민운동이 손을 잡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지배구조개선펀드는 주식을 사들인 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형태지만, 결국 최종 목표는 주가차익을 남기는 것이다. 칼 아이칸.커크 코넬리언 같은 기업 사냥꾼들이 이 펀드를 즐겨 이용하는 것만 봐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장하성 펀드'의 행보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소재지는 세금을 내지 않는 아일랜드에 있고, 외국 자본 1300억원의 운용은 소버린의 자문 역할을 한 미국 라자드에셋이 맡고 있다. 소버린은 SK㈜의 경영권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8000억원이 넘는 수익을 챙기고 철수한 바로 그 회사다.

장 교수는 "5~10년 장기 투자를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 또한 장담키 어려운 얘기다. 그 스스로도 실제 투자집행은 라자드 측이 최종 결정한다고 했다. 지배구조는 별로 개선되지 않은 채 이 펀드가 시장만 휘젓고 떠나는 상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단체들이 우려하듯 자칫 장 교수의 새로운 실험이 이용만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증권업계는 물을 만난 듯 상황을 부풀리고 있다. 이른바 자산주가 새삼 테마주로 부상하고, 기업명에 '대한'이나 '한국'만 붙어 있어도 역사가 오래돼 자산이 많을 거라며 주가가 오른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들린다.

기업들도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들이 경영권을 방어하느라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쌓아두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이다.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 노력은 중요하지만, 이번 일의 한복판에 있는 장 교수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일개 펀드의 영향력에 대한 시장 참여자의 과민반응 또한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