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조 필요한 '소설같은 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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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2030은 노무현 정부의 분배정책을 망라한 계획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먼 미래 세대의 일인 데다 재원 조달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장밋빛 선거공약과 다르지 않다. 부동산.교육.연금.실업 등 산적한 민생 과제도 풀지 못하는 현 정부가 잔뜩 생색만 내면서 실제 부담은 차기 정부에 떠넘기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처가 밝힌 필요 예산은 세금을 통해 조달할 경우 1100조원이지만 이를 국채 발행 등으로 조달할 경우는 이자 부담 때문에 1600조원으로 늘어난다. 어느 경우든 증세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올 사안이다. 또 복지 부문의 기대치가 높아지면 이를 원래대로 줄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가 이런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은 것 자체가 차기 정부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정부는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세우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런 비전을 내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 비전 발표가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목적이거나 대통령의 분배정책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사회 복지와 양극화 해소가 이슈로서의 가치는 있겠지만, 재원 조달방법이 불투명한 계획은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장기 미래 구상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집권 4년차인 1996년 '21세기 경제 장기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의 결과는 외환위기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뒤 곧 선진국이 될 것처럼 잔뜩 바람을 잡으며 환율과 물가를 억지로 낮추다 외환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 비전에 대해 여당조차 못마땅해하는 모습이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의장은 "이번 정부에선 할 게 아무것도 없다"며 "토론 자료로만 삼을 내용"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나성린 한양대 교수는 "현재의 선진국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목표는 현실성이 없다"며 "경제성장률은 과장하고, 소요 재원은 축소한 채 추진한다면 국가 재정을 파탄 낼 것"이라고 지적했다.

◆ 누가 만들었나=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현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인 지난해 7월 전문가 60여 명으로 구성된 '비전 2030 수립을 위한 민간 작업단'이 발족되면서 작업이 시작됐다. 예산처는 비전 2030의 50개 정책과제를 설정해 7개 분과를 만들었고 여기에 한국개발연구원(KDI).조세연구원.산업연구원(KIET).노동연구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 11개 국책연구기관이 참여했다.

KDI가 7개 분과 중 비전총괄팀(팀장 우찬식 박사).성장동력팀(서중해 박사).사회복지팀(최경수 박사).국제화팀(조병구 박사) 등 4개 분과를 맡았다. 나머지 3개 팀은 이화여대 박정수 교수(인적자원팀), 조세연구원 박형수 박사(장기재정전망팀), KDI 국제정책대학원 김태종 교수(사회적자본팀)가 담당했다. 서울대(안상훈).성균관대(양정호).연세대(한준).고려대(강문성).인천대(황성현)에서도 교수들이 참여했다. 변양균 전 장관에 이어 장병완 예산처 장관이 작업을 총지휘했고, 이창호 재정전략실장이 실무 작업을 관리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현정택 KDI원장과 청와대 정문수 경제보좌관, 윤대희 경제정책수석 등도 비전 2030의 전도사 역할을 맡았다.

김동호.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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