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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열기의 현장을 가다-폴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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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바르샤바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보이스지는 현재의 폴란드를 단 두구절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이제 전체주의에 「안녕」이라는 작별을 고하고 있다. 전체주의도 폴란드 국민에게 「잘 계시오」라고 작별인사를 하고있다.
영국에서라면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지만 폴란드에서는 떠나지도 않으면서 작별인사를 한다.』

<허울좋은 개혁선두>
이것은 폴란드의 자유노조주도 정부가 지난해 8월 출범하면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구성,이른바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가 그대로 상존해있고 폴란드 내부에서 개혁의 바람이 거센 가운데 구체제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신정부를 괴롭히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폴란드는 동구국가들 가운데 맨 먼저 개혁의 열풍이 몰아친 나라로 자유노조가 「철옹성」같았던 야루젤스키 공산당정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동구변혁의 모델과 같은 나라.
동구 나라마다 각각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폴란드는 오늘날의 심각한 경제난으로 또다른 장애에 가로막혀 있는 개혁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바르샤바에서 만난 2명의 지식인은 이같은 문제를 다른 식으로 표현했다.
바르샤바대 법학교수 질린스키 박사와 폴란드 일간 레푸블리카 주필 다리우스씨는 『구체제는 여전히 가동되고 있는데 신체제는 아직껏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체제에 대한 기대와 불만을함께 포함한 말이기도 하다.
연간 1천%에 이르는 엄청난 인플레와 지난 한햇동안 국민실질소득 20% 하락, 그리고 개선의 기미가 없는 생필품의 만성적 부족은 오늘날의 폴란드 국민 모두가 겪는 고통이다.
폴란드 국민 75%가 현재의 자유노조정부를 지지하고 있다는 한 정부여론조사에도 불구하고 「불만세력」 25%는 낮은 목소리로 새정부의 「무능」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또한 폴란드의 현주소다.
마조비에츠키총리의 폴란드자유노조정부는 정치개혁에는 일단 첫발을 내디뎠으나 경제개혁은 전공산당정권보다 더 단단한 사회구조적 장벽에 부닥치고 있다는 것이 이들 지식인의 평가다.
다수의 국민이 현 자유노조정부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폴란드개혁의 열기를 엿보러간 취재진에게는 또다른 놀라움과 개혁의 음영을 발견하는 흥분을 안겨주었다.
바르샤바 중심가 크라코프스키예가에 있는 질린스키박사연구실을 찾아가자 그는 검정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터키식 코피를 내놓으며 현 자유노조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질린스키박사는 『편도선염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그의 말과 달리 활기차고 빠른 말씨로 그의 주장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폴란드의 탈공산주의 가능성 질문에 대해 『노』라고 말하고 『폴란드가 공산주의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서방의 선전에 불과하다』고 못박았다.
그는 또 폴란드는 중립국가도 될수 없으며 정교일치국가가 돼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질린스키박사는 폴란드가 서유럽과는 멀지만 소련과는 가깝다는 지정학적 이유와 40년간이긴 하지만 소련과의 지속적인 과거관계를 감안하면 동구블록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톨릭역작용 우려>
그는 그러나 개혁이 이미 시작된 폴란드는 이제 공산주의·민주사회주의·민족주의·의회민주주의, 그리고 폴란드 정통의 가톨릭이 잘 융합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질린스키박사는 자신을 「진보적 사회주의자」라고 설명하면서 폴란드개혁의 기수 바웬사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바웬사나 게레메크 (자유노조의 의회집권당 원내총무)나 마조비에츠키 (총리)는 폴란드의 개혁의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개혁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폴란드에 대한 개념은 정립돼 있지 않다.』
질린스키박사는 특히 가톨릭의 폴란드정치에 대한 영향을 내심 부정하고 있었다.
『가톨릭은 유일신주의 종교다. 바웬사등은 가톨릭을 바탕으로 새 폴란드를 만들려하고 있다.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면 호메이니옹의 이란과 다름없는 폴란드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는 심지어 『교회에만 열심히 다니고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역시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젊은이는 질린스키박사의 이 말을 이렇게 뒷받침했다. 『현재 폴란드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설현장은 교회신축 공사장이다시피하다. 국민이 생계에 위협받고 외채가 누적되는 오늘날 새로운 건설은 교회에 집중돼 있는 기분이다.』
폴란드의 가톨릭은 인구 4천만명 가운데 90%인 3천6백만명의 신도를 가진 절대적 존재다.
가톨릭 사제가 2만3천명으로 전세계 가톨릭 사제 18명중1명은 폴란드인이고 매년 새로 서품받는 사제 숫자는 전세계의 9분의 1, 교회수는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9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질린스키박사의 이같은 주장은 폴란드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이 행여 폴란드의 장래에 역작용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었다.
폴란드 기자동맹회장 피욘트코프스키씨도 급격한 개혁에대해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폴란드가 바르샤바조약을 포기한다는 것은 헝가리나 다른 동구국가들과는 다른 어려움을 갖고 있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폴란드는 바르샤바조약에 의해 2차대전후에 그어진 현재의 국경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폴란드가 바르샤바조약을 탈퇴할 경우 소련에 뺏긴 동쪽의 구폴란드 영토회복문제와 독일에서 뺏어온 서쪽영토의 독일반환이라는 「복잡한 국경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계했다.

<경제가 해결돼야>
피욘트코프스키회장이나 질린스키박사는 폴란드의 개혁세력과 젊은이들이 볼 경우 구체제 인물일지도 모른다.
피욘트코프스키회장은 야루젤스키공산당정권시절 당을 옹호한 기자동맹의 대표자이고 질린스키박사 역시 구정권에서 살아온 구세대 학자라는 바르샤바의 한 젊은이의 코멘트도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 구세대 지식인들은 폴란드 새정부의 개혁은 지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개혁은 좀더 합리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욘트코프스키나 질린스키등 두 사람은 또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 정권의「무능」에 대한 불만을 갖고있는 지식인들이라는 인상이었다.
마조비에츠키정부가 당면한 또 하나의 비판세력은 오랫동안 공산당 전체주의체제와 싸워온 세력들이다. 그중 하나가 독립 폴란드연합 (KPN)이다.
지난해 10월 폴란드의회인 세임에서 멀지않은 폴란드 주택부청사 앞에서 8명의 KPN당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외로운」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회원 1만여명의 KPN은 지난해초까지만 해도 불법단체로 지목돼 지하에서 반공산당투쟁을 해온 또 다른 급진우익개혁세력이다.
KPN의 이날 시위구호는 『모든당의 평등을 실시하라』 『우리에게도 당사를 달라』였다.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부 앞의 이날 시위는 당사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우리도 정당이니 정부 (주택부)는 당연히 당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KPN의 정강은 『철저한 폴란드의 자주독립』과 『소련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등이 주내용이다.
피욘트코프스키나 질린스키등이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탈퇴나 소련과의 결별을 경계하며 마조비에츠키 정부를 비판하는 것과 달리 KPN은 완전한 결별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폴란드의 자유노조정부는 신구 양세력의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조비에츠키정부가 당면한 가장큰 도전세력은 어쨌든 서민일지도 모른다.
게레메크도 새 정부가 조만간 현재의 경제난을 해결하는 방책을 찾지 못하면 민중불만폭발로 개혁운동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시인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바르샤바로 가는 폴란드의 로트(LOT) 항공사 기내에는 헝가리를 다녀가는 많은 폴란드인들이 타고 있었다.
점심때가 돼 제공된 기내식은 딱딱한 빵 2개와 작은치즈 한 쪽, 그리고 음료수였다.
옆자리에 탄 넥타이를 맨 허름한 차림의 한 폴란드인 「신사」는 남이 볼세라 2개의 작은 빵을 종이컵과 조잡한 플래스틱 용기와 함께 가방속에다 감추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물자부족을 보여주는 폴란드인의 첫 모습이었다.
바르샤바 거리 빵가게 앞에는 예외없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폴란드 국민이 빵에 대한 욕구와 불만도 따라서 폴란드개혁정부에는 시한폭탄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바르샤바의 보이스지는 이렇게 다시 쓰고 있었다.
『폴란드는 이제 민중폭동이라는 거대한 도끼는 땅속깊이 파묻어 놓았다. 그러나 이제 곳곳에서 불만이라는 자그마한 도끼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글 김동수 부국장 진창욱 기자, 사진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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