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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단편소설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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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나흘째로 접어드는 단식이었다. 단식이 시작될 듯한 조짐은 물론, 옮긴지 두 달이 지나도록 방치해온 이삿짐을 새삼 제자리에 놓으며 부산을 떠는 어머니의 심상찮은 눈길에서 이미 드러났었다. 『인자부터 우리가 살아야헐 자린디 우리가…』하고 말한 뒤로, 어머니는 아침상을 고스란히 물리기 일쑤였고 저녁도 표나지 않게 양을 줄여갔다.
이제부터라고 외곬으로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고집 속에 내가 끼어들 자리란 없었다. 하지만 단식에 얽힌 어머니의 속내를 구태여 되짚어 볼 필요도 없었다. 두려운 것은 그 시작이 아니라 끝이었다. 단식이란 어차피 아사직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매듭지어지게 마련이라는 속 편한 계산 따위는,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화순에서 입었던 소복처럼 밑이긴 스란치마 위로 중동끈을 눌러띠는 모습은 건일을 나가는 여자의 뒷 단속처럼 야무졌다. 오래 눌러 살았던 집처럼 살림살이를 정돈해 두고 어머니는 기어코 단식중인 다른 가족들을 찾아 말없이 내곁에서 일어섰다. 한지 두른 창틈으로 들어온 아침 빛살이 어머니의 허리께에 또 하나의 끈을 죄고 있었다.
우리가 화순의 계사(계사)를 버리고 갑자기 광주로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여러모로 대책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계사에 불길이 옮겨 붙을 때부터 단식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양계를 때려 치우기로 작정하고 새끼줄로 이삿짐을 꾸리는 어머니의 기세등등한 얼굴은 하루 전에 장례를 마친 사람답지 않았다. 마지못해 거들며 잡동사니 가구들을 삼륜차에 옮겨 실은 나는 솔직히 아주 한심한 기분이었다.
이삿짐은 줄어든 식구처럼 단출했다. 사이사이 이가 빠진 사기그릇 정도나 나뒹굴 뿐, 그동안 지성으로 치던 닭들마저 남김 없이 요절낸 처지에 더 챙겨볼 이사거리가 없는 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철제 장농을 들어내자 불쑥 튀어나온 해부용 가위에 진저리를 치고는 더 짐을 챙길 마음도 내키지 않았다. 수탉의 볏을 잘라주던 그 가위는 아버지로 하여금 번번이 방안 구석구석을 뒤지게 했었다. 잘려진 두 개의 손가락 같은 그 가위 앞에서 나는 문득 아버지와 맞닥뜨린 느낌으로 한참을 제 자리에 서 있었다.
한데 어머니는 어쩐 일인지, 마치 땅고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계사 앞으로 툭 트인 마당을 맴돌며 괜한 헛걸음질이나 치면서, 쉽게 차에 오를 눈치가 아니었다. 막상 떠나자니 얼토당토 않은 미련이라도 남았다는 것일까. 일단 차에 오르기만 하면 광주가 눈앞일 터인데도이때까지의 과단성과는 생판 달리 줄곧 딴전을 부리고 있는 어머니의 심사는 참으로 모를 노릇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내가 성화를 부려도 어머니는 기껏 서먹한 표정으로 누런 이를 앙다물 뿐이었다. 입춘을 넘긴지 한 달이 가까웠으나 꽃샘 추위조차 아직 먼 날씨였다.
두어 번 더 재촉을 받고서야 차에 탄 어머니는 그래도 못내 찜찜한 얼굴로 힐끗거리며 계사 쪽을 둘러 보았다. 나는 닭피로 드문드문 얼룩진 막장갑을 끼었다. 이제 화순을 떠난다. 닭을 붙잡고 끙끙거리던 싸움들도 바로 잊혀져야 한다. 운전대를 꺾으면서 나는 그길로 내쳐 광주에 닿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육장의 출입구를 지날 즈음이었다. 외부에서 묻혀온 오물을 씻어내기 위해 만들었던 세척조(세척조)를 벗어나자 어머니가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뒷바퀴는 괸물 속에 그대로 잠겨 있었다. 차에 오르기 전부터 계사에서 얼마쯤 떨어진 세척조까지의 거리를 어머니가 눈여겨 두었다는 느낌이 퍼뜩 스쳐갔다. 이제 정말 맨주먹으로 광주에 들어갈 참이구나, 어머니의 손아귀에 꼭 맞춰 끼우듯 쥐어지는 성냥갑을 가는 눈으로 확인하면서, 나는 그렇게 단정하였다. 짚나라미가 묻은 옷깃을 휘말며, 어머니는 어느새 양계 막사 쪽에서 불어오는 매운 바람 속으로 허덕허덕 단구를 움직여 가고 있었다.
닭 한마리 남지 않은 계사 부근에는 아버지가 요절낸 닭들의 깃털이 여기저기 흉한 모습으로 흩어져 있었다. 한달음에 계사앞까지 다가간 어머니가 성냥불을 켜대자, 기름먹은 흙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른 검붉은 불길이 이내 닭장으로 옮겨 붙었다. 마침 맞불어 오는 된바람을 타고 매캐한 연기가 차 안에까지 휘몰려 들어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노상 맨발로 밟고 다니던 닭똥과 닭털의 노릿한 냄새는 그 연기 속에서도 어김이 없었다. 『인자 되았다. 가그라』 타오르는 불길 속에 날단거리를 집어던져 계사의 흔적을 송두리째 없앤 어머니가 올라갈 때보다 더욱 단호한 걸음걸이로 돌아와 말했다. 그을음을 묻혀 온 어머니에게서 불김이 그대로 전해졌다. 『싸게 가그라!』나는 막장갑을 벗어 창밖으로 내던졌다. 시동을 거는 손이 저려왔다. 후면거울 속에 남아 흔들리던 계사 뒤편의 밤나무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새벽마다 멀리서 꾜리를 끊고 달려온 별똥별이 스러지던 자리였다. 계사에서 풍겨오던 지긋지긋한 냄새는 차가 비탈길을 마저 내려와 국도변으로 접어들고서야 겨우 우리 곁을 떠났다. 너릿재 끝에 둘러쳐진 산등성이가 아주 멀어지는 동안 어머니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면을 향해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언 강물 터지는 소리가 쩽쩽 울려왔고, 그때마다 나는 속력을 줄였다.
다급해질 수록 자신도 모르게 속력을 줄이는 버릇은 군대에서 생긴 것이었다. 선발대가 뒤로 빠지고 야간 방어에 들어간 대대병력의 부식을 싣고 달렸다. 열외로 빠질 군번이었으나, 제대를 하면 어차피 운전질로 밥을 먹기 쉽다는 자괴감이 들어 굳이 부식차량에 올라탔던 것인데, 잘못이었다. 두 갈래의 전조등이 뻗쳐나가 밤길이 꽁꽁 언 강물처럼 느껴졌고, 얼음의 두께가 점차 얇아지면서 나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낯선 물체에 잔뜩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사방이 깜깜해 졌으므로 지점을 가늠할 수 없었다. 반비알진 산길을 꺾어 내려가면 바로 진지라는 생각이 든 어느 순간, 나는 터무니 없이 속력을 높였다. 운전병으로서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광주로 간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 식구는 밤새 삼륜차의 전조등을 세척조 쪽으로 비춰 두었었다. 나는 그날 수렴한 부식이 닭국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자 덜거덕거리던 국통 속에서 수십마리의 닭들이 도막난 몸을 일으켜 멋대로 홰를 쳐대기 시작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목발을 짚고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인사계 이상사가 찾아왔다. 지프가 빠른 속도로 산을 넘었다. 대낮이었으나, 나는 이번에도 달리는 지점을 가늠할 수 없었다. 퀀셋 건물 안에는, 전체적인 인상이 부드러운 대신 허투루 말을 낭비하지 않는 사복차림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형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쪽지가 내 앞에 놓였다.

<성명 김진철, 본적 전남 광주시 서구 광천동 5번지, 1958년 화순 출생, 1977년 화순농고 졸업, 양계업에 종사하던 중인1980년 5월 광주에서 사망, 평소 정부에 대한 불만이 심했으며…>
하필이면 그날 부식차량 안에는 고장난 지프를 버린 대대장이 탑승했었다. 내가 사고 당일 차량 근무자가 아니었음을 상기시킨 사내는, 형 김진철의 행적을 보면 군에 대한 김병장의 불만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따라서 이번 사고를 과실 아닌 고의로 볼 수도 있지만, 복잡한 절차만이 해결의 능사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화순에서 나고 자란 형이 어째서 아직도 광주에 묻혀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결 은밀한 목소리로, 가족들이 모두 있는 화순으로 이제라도 형을 이장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의해 왔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엉뚱하게 말려 들어서는 안된다는 긴장감으로, 나는 온몸의 피가 졸아드는 것만 같았다.
『혹시 공무원으로 일해볼 의향은 없나? 화순 군청 정도라면 우리가 천거할 수 있다. 그야 물론 김병장이 희망할 경우의 이야기고, 양계를 계속하겠다면 또 다른 협조공문을 발송하겠다. 불편이 없도록 해주겠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에서 취득한 운전면허가 군에서 취소되기는 쉽겠지만…』
대대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내가 저지른 사고가 분명했으므로, 마땅히 내가 책임질 일이었다. 그러나 뇌자상등 업무상 과실치상의 죄명과 형의 이장을 맞바꾸자는 발상은 여간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치밀한 계산 아래 끝 없이 되풀이되는 심문에 이골이 나면서 나는 다만, 딱딱한 석고 붕대 안쪽의 장딴지가 사정없이 가려울 뿐이었다.
내가 공무원이 된다면 신명날 사람은 단연 아버지일 터였다. 한동네에 살며 어려서부터 형과 같이 붙어다니던 만수가 농고를 졸업하던 해 홀어머니마저 잃게 되자, 그에게 공무원 수험서를 들이밀고 시험을 치러가는 날에는 여비까지 쥐어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농고를 졸업하면서 키우기 시작한 닭들을 내다파는 재미에 빠진 형에게는,수지가 맞으면 이따금 광주로 올라가 만수에게 술을 사는 일도 재미로 치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만수는 월급을 타면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왔다. 비록 동사무소의 맨 앞자리를 지키고 앉은 말단이나마 형의 친구 가운데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대단한 자랑으로 여겼다.
『나가 조금만 넉넉혀도 자네를 서울농대 꺼지는 보낼 것인디. 허지만 누구는 첨부터 대통령된다냐. 인자는 자네도 다 같은 공무원인디 기죽을 것 없어. 세상 사는 디는 마누라보다 친구가 웃질인께 자네도 튼실한 우정 변치 말드라고』
그러던 아버지가 만수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전화를 받고 나간 형이 주검으로 돌아 오면서부터였다. 오월이었다.
『뭐라고? 공무원이믄 다 공무원인감. 나라일을 고따위로 허고 자빠졌응께 우리 선생님도 끌려간 것이여. 고것이 넘우 일이 아녀! 공수 아니라 낮도깨비헌티 용방망이를 맞드라도 나는 꼭 가야 쓰겄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계사에서 나온 형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수화기를 건네준 어머니가 형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난리가 났다는디 워쩔라고 그려. 친구말 듣고 얌전히 있그라…』
그 때 나는 풀숲으로 벗어던진 형의 막장갑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눈 가득 온통 연초록으로 물든 풀잎이 어질어질 다가왔고, 여름 초입에 들어선 것처럼 쩡쩡한 지열이 얼굴을 덮었다.
『증심사 가서 닭죽이나 먹고 올랑께 걱정말고 기둘리시씨요』
그러나 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광주로 와서 내가 처음 잡은 일자리는 간판가게에서였다. 간판 속에 네온등을 끼워넣는 주인의 기술은 그 일대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도면 위에 고딕체 글자를 새겨 쓰는 연습부터 시작했고, 주인은 정작 탈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맞은편의 전파상에서 일어났다. 삼각자가 부러져 전파상에 빌리러갔을 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불이 꺼졌다. 혹시 정전인가 싶었으나 가로등은 멀쩡하였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리며 엉거주춤 선·내 팔뚝을 누군가가 아래로부터 잡아끌었다. 무방비상태였던 나는 소스라쳤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탁자 밑에 머리를 박고 웅크린 전파상 주인의 손이었다.
『오메, 큰일나겄소 이리 싸게 들어오라고! 엠비씨가 홀랑 타부렀는디 시방!』
그러나 막상 음량을 한껏 높인스피커에서는 「오늘 전두환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하고 심심한 아홉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한참만에 그가 일어서 불을 켜자 「오늘 타이거즈는 잠실에서 열린……』하고 대통령은 곧 타이거즈로 바뀌었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온 그가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염범헐 것. 오늘은 타이거즈가져 부렀네』
아깝지만 나는 광주에서의 첫 직장을 그쯤에서 포기했다. 야구를 형보다 더 좋아하는 그 사내와 매일 마주치며 지낸다는 것은, 광주를 알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후 자전거 수리점, 슈퍼마킷등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졸의 학력으로, 석 달 사이 무려일곱 군데의 일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나는, 내가 아직도 광주에 들어와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토록 어정쩡하게 시내를 쏘다니는 나에 비해 어머니는 진작부터 기다린듯 태도를 분명히 했다. 웃음이라고는 여전히 볼 수 없었으나 내가 심부름센터에 들어갈 즈음 이미 다른 유가족들의 얼굴을 익힌 어머니의 낯빛은 한층 좋아져 있었다.
『혼자 움직여서는 될 일도 아니여. 같은 사람끼리 아픈 디는 쓰다듬고 무거운 것은 덜어주고 험시로 살아 있는 것이제』
나도 물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매일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삶을 보다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동사무소로 가는 민원서류를 확인하는데 있었다.이사를 가지도 않았고, 사망신고가 되어 있지도 않았으나, 찾을 길 없는 사람의 거주 확인은 차라리 암담한 일이었다. 끊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사망신고서와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신고서, 그리고 행불자로 처리된 사람들의 기록은 서로 엇갈리면서 겉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혼동을 일으켰다. 밤이면 산더미같은 각종 서류에 눌리는 꿈이 그치지 않았다.
내근직으로는 여직원 하나를 두었을 뿐인 단간사무실에서, 청산 비지니스라는 거창한 이름의 심부름센터 사장은 중고나무책상에 턱을 바짝 매단 품으로 연방 도장을 찍고 있었다. 앞서 나간 직원들이 적어낸 가불전표였다. 수당날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뛰어도 지난달치에서 이월된 가불이 수당보다 많은 직원들은 한 달을 계산하기 전에 재빨리 가불을 신청했고, 그게 볼모가 되어 일자리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사장이 생색내지 않고 툭 트인 맛이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의 심부름이나 거들어 주는 알량한 일자리에 평생 뿌리를 박을 생각이 아닌 바에야, 잡다한 핑계를 대고 그때마다 구차하게 변통을 시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입에 풀칠을하기 위한 것은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실감하지 못하고, 도와주지 않는 법이었다. 오늘 첫 일감으로 떨어진 것은 광주신역에 가서 오후 일곱시 이전의 서울행 기차표를 예매하여 국민은행 충장로지점 신대리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이게 없으면 못산다는 듯이 언제나 전화통에 매달려 지내는, 사장의 거의 필사적인 자세는 아버지와 매우 닯았다. 하루종일 시내를 헤집고 다니는 열 명 남짓의 직원이 모두 모아봐야 오만원이 안되는 일비를 받아들고, 나는 느지막히 사무실을 나왔다. 아무리 제쪽에서 부탁하는 일일망정 아침 일찍부터 낯선 사람의 방문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으므로 우리는 남들이 일을 시작한 한참 뒤에야 비로소 바삐 움직이게 되는 것이었다.
심부름센터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은 법원 뒷골목의 횟집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그때까지 이장을 하지 않고 버티는 유족들과 만나고 있었다. 횟집은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증심사에서 우연히 만난 그 모임의 회원 하나가 소개한 곳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곳에서 잠시나마 일류 호텔의 일식부 주방장을 꿈꾸고 있었다.
목포에서 올라오는 횟감을 사러 새벽 위판장에 나가려면 일이 끝나는대로 식당의자를 잇대고 일쩍 눈을 붙이는게 상책이었다. 한 달가까이 귀한 생선을 질리도록 거저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주인 영감의 주정이었다.
한낮에도 무턱대고 꼭뒤까지 술이 올라 생선칼을 들고 설치는 그의 공격 대상은 주로 넥타이를 단정히 맨 법원 직원들이었다.
『느그들이 내 다리를 찔렀지야? 오늘은!』
그러면 주방에서 앞치마를 벗어던진 주방장이 날렵하게 튀어나왔다.
『왜 또 그러씨요. 아제, 증말!』『오늘은 나 술 안마셨응께!』주방장은 횟거리를 다듬을 때처럼 아주 숙달된 솜씨로 버둥대는 영감의 허리춤을 끌었다.
『손님들, 다음부터는 절대 안그러께요』
주정뱅이 영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시덥찮다는 얼굴로 다시 일감을 추리는 주방장의 태연함이었다. 영감을 뉘어놓고 나온 그는 끄떡없이 법원 직원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가 섬뻑섬뻑 칼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그 도마 소리를 피해 나는 허겁지겁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평일이어서였는지 예매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광주역과 충장로 사이의 거리도 가까웠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새로 들어온 일감을 지시받고, 그대로 다시 이동하는 단순한 반복이 일의 전부이기는 해도, 저녁 때까지 아무 탈 없이 견디려면 우선은 마수걸이가 괜찮아야 했다. 개시부터 부드럽게 나가지 않으면 종일토록 밀린 일감도 줄줄이 꼬이기 십상이었다. 차비와 식대와 전화요금까지 낱낱으로 셈하여 영축없이 일비에서 덜어버리는 벌이라는 걸 알바 없는 사람들중에는 간혹 수수료를 에누리하자는 엉뚱한 축도 있었다. 하지만 기차표를 받자마자 표값과 수수료가 든 봉투를 건네는 신대리는 다행히 군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오늘 일진이 수월하게 풀리리라는 나의 막연한 기대는 그러나, 그가 내민 또 다른 봉투 앞에서 맥 없이 허방치고 말았다.
『이것도 해주시면 고맙겄는디요』『뭐간디요?』
『사망신고서…』
이 사람이 정말, 싶은 생각으로 얼굴이 비틀어지기 전에 그가 고쳐 말했다.
『말을 실수혔고만이라. 사망이 아니라 출생인디! 서석동으로 갈 것인디 나가 바뻐서 따로 시간이 날랑가 몰릉께 으쩌요』
『아침도 안먹었는디 겁 먹이지마소』
회전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미처 물기가 가시지 않은 가로수 잎사귀들이 맑은 햇살에 이끌려 여러가닥의 빛줄기로 흔들렸다. 나는 어지럼증을 견디느라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눈자위를 꼭꼭 눌렀다. 어머니가 단식을 시작하던 날도 나는 농성동 동사무소에서 신대리와 같은 낭패를 당했었다. 그 뒤로 가능하면 나는 동사무소와 관련된 심부름은 다른 직원에게 미루었다. 하지만 신대리의 얼굴이 나보다 더 당황해서 벌겋게 달아오르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봉투를 받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만수가 근무하는 서석동이라면 굳이 마다할 까닭도 없었다. 전화로 지시받는대로 움직이다 보면 어차피 한 번쯤은 그쪽을 지날 터였다. 그때 잠깐 들러 만수에게 전하기만 하면될 터였다.
사무실로 연락하자 갑자기 신바람이 난 목소리로 사장은,
『거그가 아직 충장로라고? 잘됐네. 후딱 택시 잡으씨요! 아까참에 말한 농촌진흥원 것은 말여, 윤군이 가서 다 잘되었응께 냅두고. 자네는 택시 잡아가꼬 터미널가서 법성 차 타야 쓰겄어. 법성! 아, 영광 법성! 여비는 충분하제? 글먼 도착해서 다시 전화허시요잉?』
하고 뜨르르 말을 꿰었다. 시계를 벗어나면 수수료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차타는 일로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한갓진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채 목적지만 덜렁 잡아놓고 차를 타는 일은 도리어 고역이었다.
군복을 입고 화순으로 가던 길이 바로 그랬다. 군의 인사규정 어디에도 없는, 휴가도 특박도 아닌날짜를 받아 광주에 도착한 나는 서석동부터 들렀다. 형의 일손이 끊긴 뒤로 형편없이 주저앉은 계사와 대낮부터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운전사고에 대한 책임은 일단락 되었지만 형의 이장이 조건이라면 아버지는, 내가 공무원이 되거나 푸지게 양계를 벌이는 일 어느 쪽도 바라지 않을 건 분명했다. 이제 와서 내 입으로 이장을 들먹거리느니 차라리 형사입건되는 것이 나았다는 생각이었다.
『두루 무고허제라?』
『형이 모르는디 군대밥 먹는 나가 워츠케 알께라. 나 인자 부대서 나오는 길이어라』
『머시, 나오는 길이라고. 글먼 여태 양계장 구경도 못혔냐?』
『꼴도 보기 싫소』
『고것이 먼 배라묵을 소리냐. 나말은 이번에 새시로 단장헌 것 말인디』
『?·』
『허긴 뭔 정신이 있겄냐. 그란디 사고친 것은 잘 되었고?』
『광주 사는 형이 고것을 다 안다요?』
『그랑께 공무원이제. 다 한통속인디야. 화순 집에는 말 안혔다』『일심서 집행유예 됐고만이라』『용케 풀렸다야』
『즈그들도 다 써먹을 디가 있응께 그라제…』
나는 차마 형의 이장을 들먹거리기 위해 말미를 받고 내려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일어섰다.
알수 없는 일이었다. 뜻밖에도 계사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농축산기술자원연구소 기사가 쓰고 서울농대 농학박사가 추천한 『신양계기술』이란 책을 붙잡고, 아버지는 졸지에 때 아닌 공부꾼이 되어 있었다. 백리병, 콕시듐, 티푸스등을 외기가 만만 찮은지 뒷짐진 손을 연신 까딱거리는 아버지의 뒷 모습은 그러나 내 눈에는 조금도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지지부지하던 계사는 망사 간막이를 새로 갈았고, 목초지는 덤불을 제거하면서 차츰 때깔이 나기 시작했다. 멋대로 자란 잡풀을 베어내고 그래도 미심쩍어 한 가마니의 백반을 뿌리고 나서야 들끓던 뱀들이 잠잠해겼다. 하지만 나는 개운찮은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애면글면 양계에 매달리게된 까닭도 알 도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 기왕 새 터전을 일구기로한 바에야 내게도 한마디 귀뜀쯤 주어졌어야 마땅했다는 생각이었다.
못내 찜찜하던 나의 불안감은 결국 내가 부대로 복귀하기 바로 전에 현실로 드러났다. 노란 털빛이 하얗게 변색하면서 경아리들이 제법 성장할 무렵 장마가 닥쳤다. 봄에 사들인 병아리는 공교롭게도 콕시듐의 발병기를 장마철에 맞춘 꼴이었다. 계사 마당은 정신없이 쏟아진 장마비로 진창이 되어 있었다. 씻겨 내려가는 병아리의 시체가 곳곳에서 물큰물큰 밟혔다. 군화끈을 바짝 죄면서 나는, 턱이나 엉덩이를 서로 쪼는 나쁜 버릇을 막기 위해 병아리의 부리를 자르고 거기서 나오는 피가 멈출 때까지 쉬지 않고 가위를 비벼대는 아버지를 보았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쭈그리고 앉은 아버지의 머리 위로 매지구름이 멈추어 있었다.
단식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날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는 꼿꼿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흰 사기그릇 가득 담긴 생수 위로 드리워진 어머니의 그림자는 이틀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없는 어머니 앞에서 이따금씩 벽과 마주 선 느낌을 받았다. 영창에서도 하루종일 면벽한 자세로 서서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과였다. 한번 부러졌던 무릎이 쉽게 낫지 않고 계속 쑤셔왔다. 수송부에서 신병이 타다주는 식사는 매일 한 끼씩은 거르기 일쑤였다. 무릎뼈와 공복의 통증이 심해지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쇠털같이 많은 세월인디 싸게싸게 헐것이 머시 있겄냐. 조금만 참그라』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약골인 어머니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군복을 벗고 화순으로 돌아가자 엉망이 된 계사가 나를 기다렸다.
『장마 넘기고 남은 닭이 얼매 대도 안허는디 저퀴가 씌웠는가 저렇게 손끝 맺고 앉아서 시렁도 안헌께 나가 환장헐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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