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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제4제국」탄생우려…곳곳에 암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동독 혁명의 수도로 일컬어지는 라이프치히시의 오페라 하우스 앞 광장. 개혁요구 집회를 가진 15만명의 시민들이 가두시위에 나서면서 두패로 갈라진다.
『통일된 조국 독일』『목숨은 하나, 통일은 지금』-, 동독 국기에서 망치와 낫을 빼버린 서독 국기를 흔들며 군중들이 환호하자 다른 한편에서는『통일반대』『서독화 되지 말자』 는 피킷이 등장, 경쟁을 벌인다. 지난 11일 있었던 일이다. 그 전까지 4주 동안의 시위에서 간헐적으로 일부 군중이 통독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기는 했으나 서독 국기까지 등장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서독 국기 등장>
독일의 통일열기에 불을 붙인 것은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서독과의 국경을 개방한지 열흘쯤 지난 11월22일 콜 서독총리가 이른바 3단계 통독 10개 방안을 발표한 직후였다. 그때까지 동독의 시위군중들 가운데서는 오히려 서독과의 급속한 접근을 경계하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띄곤 했다.
콜 총리가 통일방안을 발표하기 사흘전인 11월19일 동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앞 시위 때는 『돈의 위력에 마비되는 모럴』『콜도 크렌츠도 싫다』『동독재화에는 여행자유 불가』 등등의 서독에의 예속을 경계하는 구호가 압도적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사회주의 독일당 (SDP)의 플래카드를 들고있던 한 학생은 동·서독의 급속한 접근에 대해『자본주의 경제왕국인 서독의 식민지화가 되는 것을 우려한다』며 서독의 사회민주당(SPD)과의 연결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콜 총리가 제안한 양독의 국가 연합에 의한 단계적 통독방안이란 두개의 독일이 독자적인 정부 밑에 각기 대외적으로 주권을 가진 형태라는 뜻이었다. 통일을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이 통일방안은 처음엔 감정적인 호소력을 가진 것처럼 받아들여졌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서독국내는 물론 NATO맹방, 소련을 비롯한 동·서구 여러 나라로부터 경계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국내의 여러 단체는 물론 서방 동맹국과도 의논하지 않은 콜의 애국적 열정에서 나온 선거용 구호』라는 비판이 일었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민감한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독일이 통일되는 날, 내 자리는 군인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한마디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거용 구호 불과>
동독에서는 콜 총리가 서독의회에서 통일방안을 발표한지 몇 시간도 안돼 저명한 작가·학자·정치인·종교인 30명이『우리는 아직도 서독과 대등한 사회주의국가로서 모든 유럽국가와 동등한 이웃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한때 추구했던 반 파시스트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이상을 되살릴 수 있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작가인 스테판 하임은『저쪽의 콜 총리가 이미 동독의 합병을 위한 서곡의 연주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시대는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독과 서방세계의 보도기관들은 당초 동독 사람들의 통일열기가 거리에서 표출되기 시작하며 적어도 시민의 절반쯤은 지지할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지난 11일 동독의「청소년 연구소」가 처음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통일에 찬성한다는 사람이 전체의 30%를 넘지 못했다.
개혁을 주도한「신 포룸」의 유권자중에서도 23%를 넘지 못하고, 동독 기민당 쪽에서도 25%를 넘지 못했다. 이러한 성향은 서독의 슈피겔지와 ZDF방송이 17일 발표한 여론조사결과 71%의 동독시민이 통일에 반대하는 것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통독의 대전제로서 민족 자결권이라는 원칙은 우선 동독 쪽으로부터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를 극복해야 하는 일차적 문제를 갖고 있다.

<찬성 23% 못 넘어>
또 하나의 문제는 독일 주변국가, 특히 아직도 독일에 대해 전승국으로서의 권리를 갖고있는 미·영·불·소 4개국의 태도다. 4개국 모두 민족자결 원칙에 의한 통독을 찬성한다는 입장은 보이고 있지만 『유럽의 현상과 안정이 보장돼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유럽중앙에 8천만 인구를 가진 경제대국 독일이 존재하게되는 것을 달가워할 나라는 아직 한나라도 없다. 독일의 통일은 2차대전후 40년 넘게 안정을 유지해온 현재의 질서를 깨는 대 변혁이기 때문에 불안하게 하고있다』고 미국의 독일사학자인 고든 크레이그는 말하고 있다.
현재의 변화는 전혀 예측되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에 미국·프랑스·영국 등 주변국가들이 이에 대처할 만큼 충분한 정책검토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이러한 대 변혁이 주변이해 세력간의 합의에 의한 것아 아니고 거리의 민중에 의해 촉발돼 콜 총리의 다분히 즉흥적인 반응으로 불붙고 있는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
주변국가들이 표면적으로는 독일의 통일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막상 그 가능성이 닥치자 주저할 수밖에 없게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유럽은 2차대전 직전인 1939년이래 가장 격앙된 시기를 맞고있다』는 한 영국 신문의 표현처럼 히틀러의 제3제국 이후『이제 제4제국의 탄생』 이란 경고도 일각에서는 벌써 고개를 들고있다.
1871년에 독일이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일들을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잊지 못하고 있다.『지금은 서독이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고 옛날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10년 후의 행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들 국가의 생각이다.

<아직 거리의 열기>
고든 크레이그는 독일이 통일될 경우『8천만 인구의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은 조만간 그에 맞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발전시키게 마련이다』며 역사란 어떤 의미에서 커다란 옷장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강속의 많은 옷가지 중에서 그때 그때에 따라「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듯이」정치 이념도 선택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주변 각국의 합의나 통제에 의하지 않은 독일 국민만의 통일은 미덥지 않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서독 사민당 출신 슈미트 전 총리도 금세기내에 동서의 군사동맹 해체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고 성급한 통일노력이 위험한 독일 민족주의 대두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슈미트는 통일 논의에 앞서 소련의 유럽에서의 안전을 전략적으로 보강하고 독일 패권주의 재 탄생 가능성에 대한 모든 유럽국가들의 우려를 씻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EC내의 경제·통화의 단일화와 정치적 통합에 노력하면서 동독과의 정치·경제협력을 추진해 통일여건을 조성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폴란드·헝가리·체코·동독 체제가 실패했다고 해서 자본주의라든가 사회적 시장경제가 승리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자유를 향한 의지만이 승리한 단계』라는 그의 말은 독일의 통일 문제가 중간의 모든 과정을 배제하고 아직 거리의 열기나 정치가의 열정만으로는 해결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글 김동수 부국장 ??창욱 차장 사진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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