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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방일보는 정당기관지로 정치신문인 까닭에 정치부가 제일 중요한 부서였다. 내가 정치부에 배치되었을 때 정태식 밑에는 강진의 추천으로 들어온 김 모라는 기자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정태식보다도 나이가 많아 40이 넘었는데 일평생 펜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 같았는데 다방을 경영하는 함경도출신이었다.
정치위원인 강진이 억지로 추천하니 권오직이 할 수 없이 받은 것 같았다. 그는 정태식으로부터 기사작성지시를 받고도 하루종일 연필만 빨고있지 늘 한 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형편 때문인지 입사며칠 후 편집국 회의 때 정태식이 『이제 편집국 요원수가 다 충당되었으니 부서와 자리를 정식으로 정하겠다』면서 제일먼저 정치부 기자로서 나를 지명했다. 내가 정치부장 다음가는 수석기자가 된 셈이다. 해방일보 정치부 기자면 공산당 안에서는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소위 「끗발」있는 부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공산당 간부들도 신문에 이름석자를 내려고 안달했을 뿐 아니라 신분상으로도 정치부 기자는 보증수표인 셈이었다.
부서 배치가 정식으로 결정되자 이우적은 나에게 『입당수속을 하라』고 말했다. 이력서를 써 가지고 이우적에게 『입당보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자 이우적은 사장실을 가리키며 『오직이한테 가서 서달라 하시오』라고 했다. 비주류파인 자기가 입당보증인이 되어 입당하면 불리할까 싶어 그런 줄로 짐작하고 권오직에게 『입당하는데 보증을 좀 서주십시오』하고 요청했다.
그는 나의 이력서를 받아 죽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입사할 때 이력서도 없이 추천으로 들어와 나의 이력서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우적이 그 사람 이상한 사람이네. 동무의 이런 경력을 왜 나한테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그저 자기 아는 사람 하나 써 달라고만 부탁했지?』하며 옆에 있던 조두원에게 나의 이력서를 보이는 것이었다. 조두원이 다 읽고 나서는 『이우적이 경력보다 낫구만』했다.
그때부터 권오직과 조두원의 나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침내 나는 권오직의 보증으로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해방일보사에는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와 소련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 기타 소련에서 발행되는 주요신문과 잡지가 왔었다. 권오직과 조두원은 나의 이력서를 보고 내가 러시아어를 잘하는 줄 알고 소련신문이 오면 나에게 읽고 설명하도록 했다.
권오직도 조두원도 다 소련유학출신이다. 특히 조두원은 수재로서 1925년11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1929년5월에 졸업했으니 근5년이나 소련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러시아어 발음은 아주 정확하다고 소문나서 해방일보나 조선공산당 문서에는 조두원의 주장에 따라 스탈린을 「쓰딸린」이라고 표기했었다.
그런 조두원이 『15년이나 러시아어를 쓰지 않으니 다 잊어버렸다』고 나더러 프라우다지를 읽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해방일보 편집국원의 학력을 보면 권오직과 조두원이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정태식이 경성제대 법문학부, 나와 이상운이 일본 와세다대학출신이고 그 외에는 모두 중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들이었다.
평양의 어느 기관에서 보내는지는 몰라도 소련신문과 평양의 소련군 정치부에서 발행하는 조선신문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도 며칠마다 뭉치로 해방일보에 배달되었다.
해방일보를 통해 이 신문들은 남한의 하부조직과 기관들에 배달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신문들을 읽고 소련과 평양의 동향을 분석하곤 했다.
따라서 나는 평기자로서 다른 편집위원보다도 사장, 주필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권오직의 정치가로서의 품격과 조두원의 이론에 대해 존경하게되고 그들도 나의 실력을 알아 전적으로 신임해주었다.
권오직은 나에게 군정청과 수도경찰청 출입을 담당시켰다.
기자 중에서 공산당을 대표해 그런 곳에 출입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 군정청의 기자회견은 매일 오전10시에 시작되었다. 미 군정청 공보부장은 뉴맨 대령이었다.
유머감각도 뛰어나고 얼굴도 잘생긴 사람이었다. 당시는 미 군정청 출입기자증이 있으면 어디든지 출입할 수가 있고 통행금지 시간에도 헌병에게 보이면 무사통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군정청에 동아일보는 해방 후 재간이 늦어 훨씬 뒤에 기자들이 출입했다.
동아일보 출입기자는 정치부장 노일환과 정광현 기자 두 사람이었다.
기자회견 때는 한가운데 상석에 뉴맨 공보부장(대리 때는 공보국장), 그 옆에 미스터 김이란 통역, 그 좌우에 두 줄로 각 신문·통신사 기자들이 앉아 회견했다.
뉴맨 대령의 오른쪽은 동아일보 노일환, 왼쪽은 내가 앉는 자리였다. 공보부장은 질문할 때 먼저 노일환에게 묻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나에게 물었다. 물론 두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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