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 소설 - 김중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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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작가는 자신있게 "있다"고 답했다. 빅터 파파넥이라는 디자이너의 책에서 봤다고, 지도를 보는 순간 머리가 뒤집혔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지도 공부를 시작했다고 술술 털어놨다.

김중혁의 소설을 읽는 건, 새로운 물건을 알아가는 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하나의 사물(의 가치)을 새로이 발견하는 과정이다. 창작집 '펭귄뉴스'를 읽다 보면, 자전거.라디오.타자기.LP판 등속의 미처 몰랐던 본색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번 차례에는 지도가 출현했을 뿐이다.

김중혁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앞서 열거한 온갖 잡동사니에 다 들어있다. 김중혁의 잡동사니엔 특징이 있는데, 첫째 특징이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이란 점이다. 그렇다고 애처로이 이름을 부르거나 아스라이 추억에 잠기지 않는다. 향수를 건드리지만 향수에 빠지는 건 아니다.

김중혁의 잡동사니는 디지털 시대에도 용케 살아남는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의 '무용지물'에게 각기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가령 수동식 타자기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개성을 상징하고, 라디오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전류의 역할을 맡는다. 지도는, 특히 에스키모의 지도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또 다른 특징은, 잡동사니가 소재를 뛰어넘어 주인공 흉내까지 낸다는 사실이다. 후보작을 보자. 주인공 '나'는 지도를 통해 세상을 배워간다. 예컨대 이런 구절이다. '한번은 지도를 그리다 길을 잃은 적도 있다. … 내 손에는 지도가 있었지만 그건 내가 그린 지도였기 때문에 나를 믿고 지도를 믿을수록 길을 찾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지도를 매개로 작가는 인생을 말하고 있다. '모든 지도의 중심에는 내가 살고 있던 집이 그려져 있었다. … 세계의 중심은 언제나 나였다'와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도, 지도만 있으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오차 측량원이라는 단어의 미묘한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정의롭고 올바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세상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차 측량원은 말 그대로 오차를 측량할 뿐이었다.'

김동식 예심위원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사물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란 점에서, 즉 인물이 중심이 아니라 사물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김중혁의 작업은 소중하다."

그건 그렇고, 에스키모는 손으로 더듬는 지도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소설에 나오는 매뉴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눈을 감는다. 다음,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모두 동원한다.

소설에 따르면 지도는, 눈을 감아야 만들 수 있다. 지도를 보기 위해서도 눈을 감아야 한다. 기억을 살려야 지도가 되고(만들어지고), 기억을 되살려야 지도가 된다(역할을 한다). 문득, 잊고 지냈던 어릴 적 꿈이 떠오른다. 뒤돌아 보니, 눈으로 읽는 지도만 좇으며 살았다. 진작에 길을 잃은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예심위원들은, 겨우 6개월 전에 첫 창작집을 발표한 신예작가의 작품에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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