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KBS를 흔드는 세력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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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공영방송 하면 단연 영국의 BBC를 떠올린다. 프랑스에서는 '베이 베이 세이'로, 이탈리아에선 '비 비 치'로 통한다. 국적을 초월해 '공공에 봉사하는 방송'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BBC는 영국의 자존심이고 영국인 생활의 일부다. 영국인 98%가 수신료를 내고, BBC는 질높고 품위있고 숨이 긴 프로그램들로 수신료에 보답한다. '국내에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세계에서 프로그램의 우수성과 독창성.지적 수준을 존중받는 20세기 위대한 발명의 하나'라고 BBC는 자부한다.

이 BBC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괘씸죄'로 토니 블레어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빠졌다. 지난 봄 BBC는 유엔 무기사찰단 일원이었던 대량살상무기 전문가 데이비드 켈리를 극비리에 인터뷰해 블레어 정부가 '이라크 침공 정당화를 위해 위협을 조작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블레어 총리가 격노하고 발설자를 대라고 다그쳤지만 BBC는 취재원 밝히기를 거부했다.

얼마 후 켈리는 그의 상관에게 BBC와의 인터뷰 사실을 고백해 발설자는 확인 됐다. 그러나 그는 의회 청문회에 나와 BBC 보도를 확인도 부인도 않고 이틀 후 의문의 자살을 했다. 블레어 총리는 가까운 사이인 루퍼드 머독의 매체를 동원해 BBC의 '편견과 오만'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2006년에 예정된 국왕칙허(헌장) 갱신 때 BBC의 재원과 관리규정을 손보겠다고 벼르고 있다. BBC는 다름아닌 '토니 일당들'이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80년간 고수해온 독립 전통을 지키기 위해 블레어에 대한 충성심까지 팽개쳤다. 앞으로 의회 국정조사에서 진실이 가려지는 과정은 그 자체가 생생한 한 편의 드라마다.

우리의 KBS는 어떤가. 시청료 강제징수는 BBC와 같다. 우리의 전기료 대신 BBC는 TV세트 판매에 부과한다. KBS의 영향력은 지난해 시사저널 연례조사에서 조선일보를 누르고 1위(64.7%)로 올라섰다. 왕년의 '정권 나팔수'에서 독립성과 신뢰를 크게 회복했고 지난 대선 때는 후보 간 득표율을 정확하게 맞히는 기동성과 과학성을 과시했다.

이런 KBS가 프로그램의 편성 운용을 '개혁코드'에 맞추면서 심한 역풍을 불러오고 있다. 공영방송의 목표는 보도논평과 예술 및 기술 세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갖춰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관료주의를 없애고, 공기업 특유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걷어내 투명경영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 정작 KBS가 해야 할 '개혁'이다.

BBC는 국가 정체성과 지방의 개성을 살리고, 시장이 외면하는 것을 찾아내 삶을 풍요롭게 하며, 복잡하고 분화하는 시대에 국민통합의 힘이 될 것을 사명으로 내세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최근 KBS의 문제의 프로그램들은 통합보다는 갈등을 조장하고, 현대사의 사건과 인물들의 역사적 평가에 작위적이거나 조급하게 한 곳으로 몰아가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프로그램을 통해 '정치개혁과 신문개혁 여론 확산에 배전의 노력을 기한다'는 PD들의 결의문은 공영방송의 본분을 의심케 한다. 이는 '신문권력'에서 '방송권력'에로의 악순환을 결과할 뿐이다.

수신료 강제징수 때문에 모든 활동이 공적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공영방송의 숙명이다. KBS를 흔드는 것은 수구세력도, 일부 신문도 아니다. '코드'로 편을 가르고, 독립성과 프로페셔널리즘을 훼손시켜 모처럼 자리잡아가는 '국민의 방송'을 관영방송으로 되돌리려는 시나리오와 그 세력들이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