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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싸움」에 등터진 민생|법정시한 넘긴 내년 예산 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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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회의 내년예산심의가 마침내 법정시한(2일)을 넘기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회기(19일) 내 통과마저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70년 예산안통과가 법정시한을 넘긴 이래 처음으로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인데 예산안지각처리는 야당의 5공 청산연계 예산투쟁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국회의 예산심의제도 자체가 안고있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다.
국회예산심의가 질질 끌리다보니 행정부처에서는 실질적인 업무마비가 장기화되고 정부의 내년도 정책운용에 차질이 예상되고 있다.

<5시간 허송세월>
국회예결위 대정부정책질의가 시작된 지난달 23일부터 국회는 마치 정부종합청사를 옮겨 놓은 듯한 인상.
24개 부처 장·차관은 물론 실·국장 등 고위간부와 과·계장까지 아예 국회로 출퇴근하는 사례가 벌어져 국회는 항상 7백∼8백명의 행정부공무원들이 대기실인 146호실과 그것도 모자라 복도에서 북적대고 있다.
금년은 특히 예산안심의가 야당의 지연작전과 일정을 그날그날 정하는 하루살이식 파행운행 때문에 더욱 심했다.
지난달 29일엔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예결위 전체회의가 계속돼 많은 공무원들은 국회에서 밖을 지샜다.
특히 예산심의와 함께 경찰중립화법·국민의료보험법·토지공개념관계법 등 주요법안들의 심의마저 교착상태가 계속돼 고위공무원들은 예산심의가 벌어지는 예결위와 법안심의가 벌어지는 상임위를 왔다갔다해야만 했다.
이렇게되자 행정 각 부처는 사무실마다 결재가 밀려 업무가 사실상 마비되고 급한 결재는 국회에서 이뤄지는 풍경이 속출했다.
공무원들의 불만은 이러한 어려움 때문만도 아니다. 의원들이 예산과는 무관한 정치성 발언만 계속하고 의사진행을 놓고 의원들끼리 입씨름만 하다 정회소동을 빚는 사태까지 빚어 공무원들은 하루에 4∼5시간씩은 허송하기 일쑤.
지난달 23일 안기부장 출석문제를 놓고 장시간 정회소동을 벌였고, 27, 28일 야당측은 발언자·의사일정을 내놓지 않아 오전 회의를 허송했다. 또 장관들 말꼬리 잡기로 한 장관을 2시간이상 붙잡아 3∼4시간이면 끝날 정부답변이 2일간 계속되기도 했다.
의원들의 자질문제도 공무원들의 불만대상. 국장이나 과장정도가 답변해도 될만한 내용을 놓고 총리나 장관에게 굳이 답변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지난달 30일 밤에는 술 취한 몇 몇 의원들이 『이봐 장관』이라는 모욕적 언사까지 퍼붓는 추태까지 있었다.
이날 저녁은 국방장관 초청으로 예결위소속 의원들이 만찬을 하면서 폭탄주를 몇 잔씩 돌렸다는 후문이다.

<의원 자질에 문제>
이 같은 행정부 쪽 불만과 의견에 대해 국회 쪽의 시각은 좀 다르다.
이기택 민주총무는 『최소한 장관이 자기소관업무에 대해서 80%는 알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부하들을 국회에 대기시켜놓고 답변서를 쓰게 하는 것이 아닌가』고 반문하면서 이 같은 현상을 장관들의 무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예산안통과지연에 따른 준예산편성에 대해서도 이 총무는 『법정시한을 지키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민생을 볼모로 예산안을 지연시킨다는 비난은 있을 수 있지만 여권이 최대정치현안이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5공 청산을 1년이 넘도록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정치적 이유를 들었다.
야당측은 『예산안을 심도 있게 다루다보니 지연은 어쩔 수 없다』(김원기 평민총무)고 변명하지만 예산심의연장과 막후협상 내용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달 23일 정책질의에서 최정식(민주)·윤재기(공화) 의원이 자기 선거구 사업이야기로 1시간 이상을 허비하는 등 지역구사업을 강조하는 발언으로 시간을 끌기가 일쑤이고 예산심의와는 거리가 먼 공안정국·5공 청산 등 정치적 문제를 들고 나와 여야간 설전이나 벌이는 낭비를 계속한 것은 의원들 자신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장 경우 의원(민정)은 『지연작전을 구사하더라도 예산심의와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며 『국정감사 때 국회본회의 때 몇 차례씩이나 써먹은 정치적 과제를 재탕·삼탕하는 것은 효율적 국회운영을 위해서라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산삭감문제를 보더라도 여야간에는 중요당직자·예결위원들의 지역구 사업요구분 3천억원을 반영하기로 묵계를 해놓았다는 소문이 돌고있어 의원들의 편의주의와 이해가 더 작용하는 인상.
결국 내년예산 전체에 대한 윤곽을 먼저 잡아놓고 의원들은 회의장에서 정치용 발언이나 기록용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부측에도 문제가 있다. 과거 여당이 보호해주고 정부 뜻대로 예산안을 통과시켜주던 타성이 그대로 남아있어 자기 소관예산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장관들이 있다.
경제부처 쪽 장관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정치·사회쪽 장관 중에는 부하가 써준 답변서만 줄줄 읽는 이가 있다. 의원들의 즉석 질문과 일문일답식 질문에 쩔쩔매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이 때문.

<결산은 형식적>
현재의 국회예산심의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데는 여야나 정부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우선 정기국회 회기 때만 국회예결위가 가동되는 것과 결산과 예산을 함께 다루는 것은 재고돼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민태형 예결위전문위원은 『결산과 예산의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있다.
실제 예결위에서 결산을 다루는 것을 보면 형식적이다. 결산이 행정부에 대한 구속력도 없는데다 이미 지나간 것을 구태여 철저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그래서 안평수 평민당 정책연구위원은 『예결위를 결산위와 예산위로 분리해 운영하든지 결산국회를 7∼8월에 열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감사를 실시한 후 정기국회 때는 예산국회답게 예산만 심도 있게 다루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산안 자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회에 제출된 예산안을 보면 본예산안과 부속자료까지 합쳐 10만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고, 수십만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어 예산을 직접 편성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물론 의원들의 전문지식결여와 공부 안하는 태도 때문에 예산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돼야 한다. <이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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