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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우상혁·황선우…국민들은 '국뽕' 대신 '4등'에 열광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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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배구 김연경이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 결정전 대한민국 대 세르비아의 경기에서 패하며 4위를 확정지은 뒤 아쉬워하고 있다. 뉴시스

배구 김연경이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 결정전 대한민국 대 세르비아의 경기에서 패하며 4위를 확정지은 뒤 아쉬워하고 있다. 뉴시스

“이미 제 가슴엔 금메달을 안겨주셨네요.”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의 도쿄올림픽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나온 인터넷 반응이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8일 열린 동메달 결정전에서 졌지만, 과거의 우승팀 못지않은 찬사를 받고 있다. 주장 김연경을 비롯한 선수들에게 “고마웠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 4강 진출에 실패한 여자배구 대표팀에 ‘리우 역적’ ‘리우 욕받이’라는 말이 쏟아진 것과는 다른 풍경이다.

2020 도쿄올림픽에선 ‘필승, 태극낭자’ 등의 ‘국뽕 응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메달 강박증’에 걸린 듯한 승리의 구호 대신 ‘도전’ ‘최선’ 등 스포츠 정신이 더 주목받았다. 승패와 상관없이 사력을 다한 선수에겐 ‘챔피언’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여자배구 대표팀의 준결승 브라질전은 인터넷 동시 접속자가 80만 명 이상이 몰렸는데, “항상 이길 수는 없다. 충분히 잘했다”라는 응원 댓글이 쏟아졌다. 동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에도 “메달보다 값진 감동” 등의 트위터 글이 8일 오후 4시 기준 28만 건 이상 올라왔다.

‘승리’가 아니라 ‘투혼’에 열광

도쿄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국군체육부대)이 1일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선에서 마지막 시도 실패 후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쿄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국군체육부대)이 1일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선에서 마지막 시도 실패 후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질 때 지더라도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의 명승부에 과거 어느 때보다 울고 웃는 이들이 많았다. 올림픽 기간 유튜브 인기 동영상은 메달리스트들의 모습이 아닌 배구 김연경(33), 육상 우상혁(25) 등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로 평가받는 ‘4등’ 선수들이 싹쓸이했다. 대학생 강병찬(26)씨는 “메달이라는 결과를 중시하는 올림픽이 아니라 과정에 주목한 올림픽이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몇 등했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선수가 4년 넘게 노력했던 시간은 경기에 다 보였다. 그런 선수들을 응원 안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간절함이 없어 보이는 태도는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야구 대표팀 강백호(22)는 지난 7일 동메달 결정전 당시 패색이 짙던 8회 초 더그아웃 펜스에 몸을 기댄 채 무기력하게 껌을 씹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됐다. 선수들의 부적절한 태도는 병역 면제 포상제와 국내 프로야구 리그에서의 방역 수칙 위반 등 스포츠계의 ‘공정’ 이슈로까지 번졌다.

개인과 스토리에 주목…이젠 ‘#가보자고’

2020도쿄올림픽을 마무리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한 한국 선수들의 환호의 모습. 남자 에페 단체전 동메달(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자배구 터키전 승리, 높이뛰기 우상혁 한국신기록 수립, 도마 신재환 금메달 획득, 야구 도미니카전 역전 끝내기, 양궁 혼성 안산ㆍ김제덕의 금메달, 유도 은메달의 조구함. 연합뉴스

2020도쿄올림픽을 마무리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한 한국 선수들의 환호의 모습. 남자 에페 단체전 동메달(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자배구 터키전 승리, 높이뛰기 우상혁 한국신기록 수립, 도마 신재환 금메달 획득, 야구 도미니카전 역전 끝내기, 양궁 혼성 안산ㆍ김제덕의 금메달, 유도 은메달의 조구함. 연합뉴스

국뽕이 줄어든 자리는 선수 개인과 그가 써온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채웠다. 팬들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직접 그린 ‘팬 아트’로 응원했고, 메달 유무와 상관없이 선수들의 SNS에는 “수고했다” “잘했다”는 응원 메시지를 남겼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모두에게 ‘꽃메달’을 걸어주자”는 제안도 나왔다. 직장인 정국진(35)씨는 “성적보다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에 주목했다”며 “자칫 소외될 수 있는 선수들에게도 응원 메시지를 남기게 됐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번 올림픽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다”고 했다.

도쿄올림픽 기간에 SNS에서 유행한 문구 중 하나는 ‘#가보자고’였다. 승패보다 최선을 다했다면 끝난 게 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선수들의 다짐이자 팬들의 응원이었다. 준결승전·결승전 등 주요 승부처 경기마다 인터넷을 점령한 이 말은 메달권 밖의 선수에게도 예외 없이 쓰였다.

양궁 김제덕(17) 선수가 개인전 32강에서 탈락했을 때 인터넷에서는 “가보자고”라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2024 파리올림픽이 있으니 (져도) 괜찮다”는 격려가 담겼다. 2m 39㎝ 벽을 넘지 못한 우상혁 선수, 남자 자유형 100m 결승에서 5위를 차지한 황선우(18) 선수에게도 “가보자고”라는 응원이 잇따랐다. 오늘의 패배를 아쉬워하기보다 선수의 앞날을 기대하는 격려의 응원 문화가 대세로 자리잡은 것이다.

다시 불거진 엘리트 체육의 딜레마

7일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야구 도미니카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 6-10으로 패한 한국 선수들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7일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야구 도미니카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 6-10으로 패한 한국 선수들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의 누적된 딜레마 상황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종합 10위권이라는 국가적 목표 달성 실패(16위), 병역 면제 혜택과 연계된 야구와 축구의 성적 부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스포츠계와 팬들 모두 고민스러운 상황이다. 야구의 경우 “메달을 따더라도 병역 면제는 안 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지만, 성적에 연연해 제도를 바꾸는 것도 비판의 취지와 모순된다는 지적도 있다.

장익영 한국체육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는 “각 종목의 연맹·협회·기업·선수 등 다양한 이해집단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여전히 하향식 거버넌스다. 소통과 대화의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조화와 동반 발전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한승백 한림대 체육학과 교수는 “메달을 가치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결속력과 공동체 의식에도 기여하고, 어떤 엔터테인먼트보다 즐거움을 준다”고 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 체육과의 연계 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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