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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은 공명을 기다리는가|송진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단재 신채호가 대한 매일신보에서 매서운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1908년 무렵 지식인들이 자나깨나 생각한 것은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기키는 문제였지만 현실성 없는 공리공논도 많았던 모양이다.
한때는「제갈량대망논」같은 것이 무성해 지식층들이 둘러앉기만 하면 현실적 방책은 생각않고 신기묘산으로 조조군에 연전련승한 제갈공명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삼국지얘기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심지어 꿈에 제갈량을 만났다는『몽견제갈량』이란 책까지 나왔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단재는 이런 한심한 세태에 대해『20세기 대한의 천지에 앉아 나파륜(나폴레옹)이나 탁사맥 (비스마르크)은 꿈꾸지 않고 제갈공명을 꿈꾸니, 슬프다 공명의 남목포석이나 목우류마가 속사포나 기차를 어찌 격퇴할 것인가』고 개탄했다.
그러고는 천백번 공명을 꿈꾸는 것이(신학문을 배우는) 소학생을 한번 꿈꾸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최근 5공 청산 작업에 나서고있는 민정당의 모습에서 단재의 이 서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민정당은 5공 청산을 한다면서 구한말 지식인들이 제갈량을 기다리듯 현실성없는 5공 청산의 묘수 찾기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른바 5공 핵심인물 처리와 전대통령들의 증언을 놓고 민정당이 하는 일을 보면 실제로 이런 일을 실현시킬 실천적인 노력은 없이 허구한날 신기묘산을 짜내는 데만 골몰하는 것 같다.
정호용의원 문제만 하더라도 겉으로는 정치적 처리를 반대한다고 하면서도「탈당 후 고발」「고발 후 퇴진」이니,「용퇴호소」니,「광주책임과는 분리 퇴진」이니,「장기외유」니 하면서 온갖 묘수아닌 묘수들을 띄워보내고 있다.
정 의원 자신의 결심이 없으면 이런 묘수들이 한낱 물거품 같은 공논밖에 안되는데도 누구 한사람 정의원을 찾아가 흉중을 열어놓고 결심을 촉구했다는 얘기는 없다. 정의원 자신은 결코 사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민정당의 분위기나 세력분포를 보아도 의원총회나 중집위에서 정의원 퇴진을 강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머리를 짜낸 묘수를 갖고 설사 야당 측과 협상이 된다 하더라도 그 합의사항을 무슨 방법으로 실천에 옮길 것인가.
전대통령들의 증언문제도 그렇다. 그들의 증언이 5공 청산의 불가결한 한 수순이라고 판단했다면 그것을 실현할 구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간혹 고위인사가 백동사를 다녀왔다는 소리가 풍문처럼 들리기만 할 뿐 책임 있는 여권의 누구도 정면으로 전씨와 증언문제를 상의했다는 얘기는 없다.
전씨 스스로 답답한 나머지 언제 어떤 형태로든 증언을 하겠다는 의사표시를 거듭하고 있지만 민정당은 여태 증언의 형식과 방법을 야당 측과 협상만 하고있을 뿐이다.
기괴한 형태의 형벌 아닌 형벌을1년씩이나 당하고있는 전씨와 변변히 대화조차 나누지 않고 있다가 그가 갑자기 국회증언을 않겠다고 나오면 무슨 대책이 있는가. 실제 최규하 전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증언을 않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데 민정당의 대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처럼 5공 청산에 임하는 민정당의 태도를 보면 제갈량의 신기묘산만 찾고 있을 뿐 문제를 정면에서 풀어보려는 구체성과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의원을 사퇴시킬 것인지, 아닌지 방침부터 알 수 없고 전대통령의 증언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당최 감을 잡기가 어렵다. 이것이「외곽을 때리는」노련한 고수의 정치인지, 민정당의 한계인지 알 길이 없다.
민정당이 정말 5공 청산에 관한 야당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먼저 당총재나 당을 대표할 간부가 전대통령과 정의원을 만나 담판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한다.
노대통령이 전 전대통령을 못만날 이유도 없다. 친구요, 동지요, 후원자였던 전씨를 취임 후 한번도 안 만났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정의원과도 만나 결론을 내려야지 당방침인지 아닌지도 모르게「핵심인물처리」의 묘수만 띄우는 것은 같은 당의 동료로서 할 일도 아니요, 정정당당한 공당의 정치행태도 못된다.
민정당이 5공 청산에 관한 야당요구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을 내야한다. 어떤 대안이 있을지 모르나 광주문제의 책임과 전대통령의 마무리증언에 관한 방안이 포함돼야할 것이다.
현재 민정당의 움직임을 보면 야당안을 거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돌아가는 낌새를 보면 거부가 아니라 수용의 뜻이 이미 통고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수용했다고 보기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실천이 보이지 않는다. 이럭저럭 시간을 끌면서 분위기로 정의원 사퇴를 유도하거나 야당과 국민이 지쳐 제풀에 주저앉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민정당은 이제 더 이상 앉아서 제갈량을 기다리면서 헛된 묘수나 궁리해서는 안된다. 문제가 있는 이상 피하려고만 할게 아니라 정면에서 대응하고 태도를 분명히 해야한다. 외곽을 빙빙 돌면서 분위기와 시간에 대세를 맡기는 정치는 그만둘 때가 됐다. 지난번 노대통령을 맞은 부시미대통령이 콩심은데 콩난다는 한국속담대로 평화를 심은데 평화가 자란다고 했다는데 5공 청산도 심어야 5공 청산이 나오지 앉아서 묘수만 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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