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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출발 '한ㆍ미 국장급 협의', 말 많던 '워킹그룹 시즌2' 안 되려면...

중앙일보

입력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만들어졌던 한ㆍ미 워킹그룹이 2년 반만에 사라진다. 한국은 '종료'를 발표했지만, 미국은 '재조정' 측면을 강조하며 후속 협의체 마련에 방점을 두고 있다. 워킹그룹의 간판은 내리지만 기존의 순기능은 살리고 역효과는 줄이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9년 5월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이도훈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등 한ㆍ미 대표단이 워킹그룹에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2019년 5월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이도훈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등 한ㆍ미 대표단이 워킹그룹에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12차례 회의' 통해 10여건 제재 면제

워킹그룹 회의는 2018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총 12차례 열렸다. 한ㆍ미 관계 부처 당국자들이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대면하거나 화상으로 만났다. 외교부에선 차관급인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미국에선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수석대표를 맡았다.

12차례 만나 10여건 면제 받았지만... #'장애물' 오명에 北 거부로 이행 불발 #"남북 관계 발전 취지 강조, 효율성 높여야"

발족 취지는 대북정책 전반을 논의하는 것이었지만 초점은 주로 남북 간 협력 사업을 위해 대북 제재의 예외 승인을 받는 문제에 맞춰졌다. 제재 예외 승인(라이센스)을 받은 경우가 10건이 넘는데,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 비무장지대(DMZ) 내 유해발굴, 남북 도로연결을 위한 공동 조사 사업 등이다.

한미 워킹 그룹 관련 일지.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한미 워킹 그룹 관련 일지.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오명' 벗고 '존재감' 높여야

사실 워킹그룹이라는 이름의 협의체가 있든 없든 특정 사업이 대북 제재 위반 소지가 있을 경우 예외를 인정받지 못하면 진행하기 어렵다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워킹그룹이 생긴 뒤 남북 간 사업이 대북 제재 때문에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경우 책임을 워킹그룹에 돌리는 일이 잦아졌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워킹그룹이 아니라 제재 때문에 막힌 것이다. 워킹그룹은 제재라는 법제도를 준수하는 경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애초에 대북 제재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때문에 부과된 것이란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워킹그룹을 탓하는 건 과속을 해서 적발돼놓고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지 못한 것은 예외로 사정을 봐주지 않은 경찰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2019년 5월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대화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2019년 5월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대화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그럼에도 워킹그룹의 오명을 바로잡기엔 한계가 있는 것도 현실인 만큼 후속 협의체는 효율성과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지난 22일 국회 외통위에서 '한미 국장급 정책대화'(가칭)을 제시하며 한국에선 외교부 국장급인 평화외교기획단장ㆍ북핵외교기획단장을, 미국에선 부차관보급의 대북특별 부대표를 수석대표로 꼽았다. 새 협의체를 통해 제재뿐 아니라 관여의 방법 역시 논의하겠다고도 설명했다.

이를 두고 더 낮은 급의 당국자끼리 만나 더 폭넓은 대화를 한다는 설명은 어폐가 있다는 지적도 외교가에선 나온다.
다만 성 김 대북특별대표가 주인도네시아 대사를 겸임, 북핵 문제에만 '올인'하기는 힘든 상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새 협의체의 수석대표를 정박 부대표가 맡는 게 효율성은 높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박 부대표는 워싱턴 국무부에 상주하며 범부처적 논의가 필요할 경우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정상이 외교와 관여를 강조한 만큼 새 협의체 역시 이에 중점을 둬야 일치된 대북 접근이 가능할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기존 워킹그룹이 원래 갖고 있던 부정적 이미지가 대화와 외교적 해법을 열어놓은 바이든의 대북 정책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며 "남북관계 발전을 돕는 협의체라는 취지를 강조해 바이든 행정부는 달라졌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함께 지난 22일 청와대를 방문한 정 박 대북특별부대표. 연합뉴스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함께 지난 22일 청와대를 방문한 정 박 대북특별부대표. 연합뉴스

'원스톱' 강점은 강화해야 

한ㆍ미 워킹그룹이 내세웠던 가장 큰 강점은 '원스톱 소통'이었다. 한국 측에선 청와대,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가, 미국 측에선 백악관, 국무부, 재무부 등이 참석했고 유엔 측이 배석하기도 했다. 유엔 안보리 제재와 미국의 독자 제재를 다루는 당국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훨씬 신속하게 제재 면제 등을 논의할 수 있었다.

다만 각 부처 당국자들이 모여있다 보니 서로 책임 및 결정권을 떠넘기는 모양새가 연출돼 막상 협의가 끝난 뒤 손에 잡히는 성과 없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수석대표를 맡는 외교부와 국무부가 제대로 된 컨트럴타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다 큰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ㆍ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위해 만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ㆍ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위해 만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대북 저자세 기조가 더 큰 장애물

한ㆍ미 워킹그룹의 성과가 실제 이행으로 이어지지 못한 데는 사실 북한의 '변심'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워킹그룹을 통해 10여건의 제재 예외 승인을 받아놓고도 대부분 사업이 실제 이행되지 못한 것은 북한이 막판에 남북 교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일시적 호응에 고무돼 제재 면제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사업을 진행하거나, 무리하게 한ㆍ미 협의에 상정할 경우 미국과 신뢰 문제로 직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2019년 5월 이후부턴 북한의 워킹그룹에 대한 불만을 의식해 워킹그룹이라는 명칭을 부르는 것을 삼가기도 했다.

향후 한ㆍ미 국장급 협의에선 남북교류사업에 대한 북한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는 동시에 대북 정책에 대해 한ㆍ미가 원칙적이고 일관적인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협의체가 존재감을 잃을 경우 미국이 대북 협상에 있어 자칫 한국과 협의를 건너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워킹그룹 종료가 본질적으로는 없앨 수도 없는 장애물 하나를 치워보려다 오히려 패싱 당하는 결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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