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강수의 시선

두 얼굴의 법원이 빚은 법정 풍경

중앙일보

입력 2021.05.20 00:30

업데이트 2021.05.20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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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7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4월초부터 매주 사흘씩 핵심 증인 녹음파일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7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4월초부터 매주 사흘씩 핵심 증인 녹음파일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2월 법관 정기 인사 때 법원의 얼굴은 두 개였다. 남녀 얼굴이 반반인 만화영화 속 아수라 백작처럼. 두 개의 얼굴은 각기 다른 법정 풍경을 낳았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 대법정.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 의혹 재판에서 증인 신문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날까 싶어 까치발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검사가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물었다.
-2015년 법관 정기 인사 때 윤리감사관실로부터 '물의 야기 법관' 명단을 보고받고 인사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나. 윗선 지시가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검사가 다시 증거 순번 1만 1153번 문건을 제시하고는 "'표가 날 수 있다'는 인사심의관실의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인사권자의 뜻이 강해 송모 판사의 통영지원 전보를 막지 못했다고 적혀 있는데 사실인가"라고 추궁했다.
 순간 이상한 낌새가 들었다. 법대 위에 앉아 있는 판사 세 명, 법대 아래의 검사, 피고인, 변호인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목소리는 들렸다. 증인도 없었다. 확인해 보니 법정 스피커를 통해 1년여 년 전 증인신문한 녹음파일을 틀어놓고 듣는 거였다. 양 전 대법원장을 바라보니 두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박병대 전 대법관은 소송 서류에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드넓은 대법정 방청객은 달랑 두어명. 130여회 재판을 빠짐없이 참관한 한부환 전 법무차관을 포함해서다.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의 대학·사시 동기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부가 녹음파일을 듣는 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좌석 배치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부가 녹음파일을 듣는 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좌석 배치도.

 오후 4시를 전후해 15분간 휴정하자 양 전 대법원장, 박 전 대법관, 한 전 차관이 자연스레 복도에 모였다. 한 전 차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검사가 인사(人事)의 '인'자도 모르고 기소했다. 하늘이 파랗다는 걸 기소한 거나 마찬가지다. 너는 왜 파란색이냐, 파란색의 구성 인자는 뭐냐 이런 걸 물어보고 있다. 공소 취소해야 마땅하다."
-사건 기록이 수십만 쪽인데.
"검찰에 '기록이 두꺼운 사건일수록 무죄'라는 말이 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기록이 많아진다."
 양 전 대법원장은 연혁적으로 접근했다. "원래 행정처에는 법관이 근무 안 했다. 법관을 쓰면서 행정처 겸직 발령을 냈다. 행정처 근무하는 동안에는 신분이 법관이 아니다. 재판에 관여할 직권이 없다."
 누군가 "저런 (인사가) 직권남용이면 지금 대법원에서 하는 건 상(上)직권남용이다. 기소도, 징계도 안 됐는데 부장판사, 법원장 발령을 안 내고 있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법정 녹음파일 듣기'라는 희한한 광경은 지난 2월 법관 정기 인사에서 재판부가 전원 교체된 것이 발단이었다. 2년 동안 이 재판을 진행해온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가 떠나고 형사35-1부(재판장 이종민)가 맡으면서 핵심 증인 4명의 증언을 듣기로 한 것이다. 4월 9일부터 월·수·금 3일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 진행하며 여름 휴가 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양승태 재판과 혐의가 연결되는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 사건을 맡은 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 윤종섭 부장판사가 6년째 중앙지법 근무를 하게 된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는 유임 한 달 뒤 둘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기소된 피고인 14명 중 1심 첫 유죄 선고였다. 법원행정처가 지적이나 권고의 형식을 빌려 재판에 영향을 미쳐도 직권남용이라는 취지의 새 법리해석이 근거였다.
 "재판 내용과 시간이 축적돼 있는데 교체라니. 윤 부장판사는 그대로 두면서 우리 재판부만." 이상원 변호사는 "재판 지연으로 인한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법원 스스로 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치명적 실수다. 판사가 판사를 재판하는 사건에서 그랬으니 더욱더. 대법원장 리스크도 크다. 임성근 판사 탄핵과 관련해 거짓말이 탄로 나며 사법부의 권위가 추락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감 표명 발언 이후 이전과 정반대로 나온 일본군 위안부 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은 신종 재판 거래 아니냐는 의심마저 사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 시절 사법행정의 이름으로 재판 독립을 침해했는지, 청와대와 사법부 간 상고법원 관철을 위한 재판 거래가 있었는지를 다투는 사법 농단 재판과 유사해 보인다.
 형사 판결은 원래 신의 영역이다. 사제에서 법관으로 재판권이 넘어갈 때 법복을 입힌 이유다. 시대는 지금 판사들에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이 뭐냐'고 묻고 있다. 정치적 편향 없이 증거와 법리에 입각해 판결하는 '딸깍발이 판사'가 많아져야 한다. '세상이 원하는 답을 만들어 내면서 성향을 의심받는 판사'(김태규 『법복은 유니폼이 아니다』)가 설 자리는 없어야 한다.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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