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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어차피 같이 살건데"…매맞은 아내 보호조치 이랬다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지난 2018년 10월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여성 A씨(47)가 한 남성으로부터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긴급체포 된 남성은 A씨의 전 남편이었다. 피해 여성은 이혼 후 4년 동안 전 남편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아 수차례 거주지를 옮겼으나 끝내 살해됐다. 전 남편에게는 A씨에 대한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른바 ‘강서구 전처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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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강화돼도 되풀이되는 가정폭력 비극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3년이 지난 지금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사정은 나아졌을까.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선 경찰이 법원의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내린 접근금지명령의 집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 B씨(31)는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112에 신고했으나 출동한 경찰은 눈앞에서 위반 사례를 보고도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며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현행법에 따라 접근금지를 어긴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해야 함에도 경찰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양보하라”며 남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갔다. 피해자 B씨는 자신의 명의인 집에서 남편을 피해 나와야 했다.

경찰이 가정폭력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강서구 전처 살인사건’ 이후 만들어진 것이었다. 강서구에서 접근금지명령을 어기고 전처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한 달 만에 정부는 여성가족부·법무부·경찰청 등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을 열고 ‘가정폭력 방지대책’을 발표했다. 경찰이 가정폭력 현장에 출동해 현행범을 즉시 체포할 수 있도록 하고, 접근금지 명령을 어겼을 경우 기존에 과태료에 불과하던 제재 수단을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처벌 수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개정안에 담았다.

과거에 머무르는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자의 눈물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개정된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경찰의 권한은 커졌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법이 강화됐음에도 가정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 등 수사당국의 인식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했다. 김다슬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가정폭력처벌법이 개정됐지만, 여전히 경찰들이 개정안을 숙지하지 못해 현장에서 피해자들이 안내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경찰이 가해자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경찰의 소극적 행정을 개선하고자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현행범 체포 등의 조항을 넣었음에도 현장에선 무용지물이다”고 지적했다.

“가정폭력은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기 쉬워” 

더욱이 가정폭력은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부간의 다툼 등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경험하는 2차 피해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7월 경남 김해에서 사실혼 관계로 함께 살던 남성으로부터 6개월간 상습 폭행을 당한 C씨(29)는 경찰 신고 당시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 임신한 상태로 폭행을 당하던 C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C씨는 “출동한 경찰이 ‘어차피 계속 살 사이가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며 “오히려 가해자를 피해 친정집으로 피신해야 했다”고 말했다.

지난 3월에 발표된 ‘2020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상담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한 총 상담 건수(3만9363) 중 가정폭력 상담은 40%(1만755건)를 차지했다. 이 중에는 경찰·검찰·법원에 의한 2차 피해에 대한 상담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가정폭력으로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에게 경찰이 “잘 해결하세요. 말로 좋게 해결하세요” “남편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세요” “별것도 아닌 일로 그런다” “그냥 이혼하라”고 성의 없이 말하며 가정폭력을 ‘가정사’나 ‘부부싸움’으로 치부하고 피해자를 탓하는 사례들이 보고됐다.

안민숙피해자통합지원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은 “경찰의 긴급조치 내지 법원의 명령을 받은 가해 남편이 피해자 주변을 배회하거나 주거지에 침입하면 경찰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즉시 분리조치해야 한다”며 “제대로 분리하지 않으면 폭행과 살인, 협박 등의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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