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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판사 할일…떼쓰지 말라" 되레 매맞는 아내 울린 경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내린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을 경찰이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도와달라는 피해자 앞에서 “판사가 할 일이다”라며 되돌아갔다. 피해자는 경찰로부터 “떼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남편을 피해 집을 나와야 했다.

경찰, 피해자보호명령에 “그냥 종이일 뿐”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2일 중앙일보 취재에 따르면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가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겨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발생했다. 앞서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던 피해자 B씨는 지난 3월 30일 법원에 피해자보호명령을 청구했고, 지난달 1일 남편에게는 B씨의 주거지와 직장으로부터 100m 이내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졌다.

남편을 피해 집을 떠나있던 B씨는 지난달 5일 법원으로부터 남편에게 임시보호조치명령서가 송달됐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 날 집을 찾았다. 그러나 남편이 여전히 집에 거주하고 있자 B씨는 112에 신고했고, 서울 강서경찰서 관할 지구대의 A경위 등이 출동했다. 집 밖에서 경찰을 기다리던 B씨는 경찰이 도착하자 함께 집으로 향했다.

“경찰은 못 도와준다”, 판사에게 전화하라 요구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그러나 경찰은 집 안에서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발견했음에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법원의 명령에 따라 남편의 퇴거를 요청한 피해자에게 오히려 이를 집행할 수 없다면서 이른바 ‘막말’을 이어갔다.

B씨가 임시보호조치명령서를 보여주자 A경위는 “이건 그냥 종이일 뿐이다”고 일축했다. A경위는 B씨에게 해당 명령서를 발부한 판사에게 전화를 해보라면서 “법원이 이렇게 종이 딱지만 보내놓은 건 무책임한 것”이라며 “우리는 법원하고 다르다. 우리한테 강제력을 요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후배 경찰이 도와주려 하자 “너는 나가 있어”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지난달 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주택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어긴 남편을 신고했으나 경찰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 이행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가람 기자

A경위는 피해자 B씨를 도와주려는 후배 경찰을 제지하기도 했다. 후배 경찰이 “퇴거를 명하는 것을 전제로 접근금지가 내려진다”며 남편이 집에서 나가는 것이 맞는다고 설명하자 A경위는 후배 경찰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지시했다. 이어 A경위는 “후배가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라며 “(집행은) 판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B씨가 집 안에서 가해자인 남편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편을 두둔하는 듯한 A경위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A경위는 “남편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B씨에게 “떼쓰지 말고 서로 한 발씩 양보하라”고 말했다. 이에 B씨가 “오늘 또 밖에 나가 있어야 하냐”고 묻자 A경위는 “그렇다, 남편 얘기도 일리가 있지 않으냐”고 했다. 결국 B씨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B씨는 “A경위는 거실에서 가해자인 남편에게 자신의 명함을 줄 정도로 친절하게 대했다”며 “가정폭력 등 여러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되고 있지만,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B씨는 “‘떼쓰지 말라’는 경찰 말을 듣고 다시 남편을 피해 집을 나오면서 엄청난 실망감과 절망감을 느꼈다”라고도 했다.

현행범 체포해야 하는데…경찰 “업무 미숙했다”

현행법상 이러한 경찰의 행동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은 피해자 보호를 위해 필요한 경우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피해자보호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를 어긴 가정폭력행위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한다.

김경수 변호사(법률사무소 빛)는 “가정폭력행위자가 법원의 임시보호명령을 어기고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즉시 퇴거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이를 거부하는 경우 현행범으로 체포했어야 한다”며 “이러한 경찰의 행동은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매우 부적절한 대응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경찰의 대응에 대해 강서서 관계자는 “경찰이 강제력을 행사해 남편을 퇴거시키는 게 맞았다”며 “출동한 경찰이 이런 상황을 자주 처리하지 않다 보니 업무에 미숙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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