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모레 맞으러 오라"…뿔난 고령층 "백신 협박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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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 사는 90대 A씨는 지난 26일 동 주민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모레(28일) 아침 접종하러 오라”는 통보였다. A씨 지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센터는 집과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다. 홀로 이동이 어려워 자녀와 함께 접종하러 갈 생각이었던 A씨는 갑자기 연락을 받고 당황스러웠다. 자녀가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동행하려면 휴가를 미리 내야 한다며 “다른 날은 안 되느냐”고 물었지만 센터 측은 “백신 물량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예약을 재촉했다. 미루면 내달 말에도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투였다. A씨가 “5월로 미루면 언제가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센터 관계자는 “그때 가봐야 안다”며 “하루, 이틀 전에 알려줄 수 있다”고 답했다.

이달 1일부터 75세 이상 고령층 접종이 시작된 가운데 A씨처럼 접종 날짜가 임박해 연락받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불만이 나오고 있다. A씨는 “시간적인 여유도 주지 않은 채 통보해놓고, 안 맞으면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건 협박과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한다.

28일 한 지역 코로나19 예방접종 센터에서 한 어르신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접종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한 지역 코로나19 예방접종 센터에서 한 어르신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접종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에 사는 80대 B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는 지난 27일 “29일 접종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B씨는 “몸살 기운이 있어서 며칠 뒤에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담당자가 “연기는 가능한데 언제 맞게 될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B씨는 “기회를 놓치면 안 돌아올까 봐 일단 가겠다고 신청은 했는데 가도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경기 의정부 지역 한 맘 카페에는 지난 28일 “5월 3일로 예약잡았는데 며칠 후 26일로 가능하냐고 해서 싫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또 연락 와서 29일 가능하냐고 한다”며 “2번째 연락을 받은 건데 당기는 게 나을까요”란 글을 올라왔다. 이 여성은 “(해당 날짜에 접종하지 않으면) 수급량이 부족할 수 있어 뒤로 밀릴 수 있다고 한다”며 당겨 맞자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아 걱정된다고 썼다.

이런 사례가 알려지면서 보건당국이 목표로 하는 접종 인원을 채우기 위해 접종을 서두르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앞서 홍남기 국무총리 직무대행은 26일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이달 내 300만명에 접종을 완료하겠다고 천명했다. 28일에도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3월 말 하루 2만여 명의 접종이 이뤄졌던 것에 비하면 8배 정도 빨라졌다”며 “4월 말까지 300만명 이상 접종을 완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접종률 지적을 의식한 듯 연일 접종 인원이 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다소 무리하게 접종 일정을 밀어붙이는 것 아닌지 우려가 나온다.

무균 작업대에 놓인 코로나19 화이자 백신. 연합뉴스

무균 작업대에 놓인 코로나19 화이자 백신. 연합뉴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중앙에서 지난 23일 회의 때 각 지자체에 배분받은 백신을 이달 말까지 소진해야 한다고 알려줬고, 이에 맞춰 주말에 목표량을 세웠다”며 “조기 개소할 수 있는 센터를 열고 의료인력을 충원했다. 당초 센터에서 하루 평균 400명씩 접종했는데 전화를 돌려 가능한 분의 예약을 당기는 식으로 최대 1200명씩 예약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역은 이달 1~27일 3주 넘게 누적 접종자가 4만7000명인데, 지난 23일부터 이달 말까지 일주일간 3만9000명 정도에 추가로 주사를 놔야 한다. 앞선 관계자는 “가능한 대로 최대한 맞춰 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달 1일부터 만 75세 이상 대상 접종을 시작했지만, 지역별로 센터가 순차로 문 열면서 일부 뒤늦게 개소한 접종센터에서 A, B씨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달 초 센터를 열고 접종을 시작한 경기 성남시 분당 지역의 90대 C씨는 접종 날짜를 일주일 전쯤 미리 배정받았다.

지역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의료진이 어르신에게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역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의료진이 어르신에게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중앙포토

A씨 지역 시청 관계자는 “접종센터가 이번 주에 문을 열었다. 여유를 두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중앙정부에서 이번 주 안에 이만큼은 접종 완료하라는 지침을 내려 어쩔 수 없었다”며 “갑자기 접종을 서두르게 돼 밤늦게까지 연락을 돌렸다”고 해명한다.

전문가들은 고령층의 경우 안전한 접종을 위해 컨디션이 좋을 때 접종할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접종 날짜를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접종률이 낮다고 하니 다급한 듯한 모양새인데 접종 속도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며 “고령자는 특히 신체적으로 허약하고 기저질환이 있어 마음의 준비가 되고 휴식을 취한 뒤 편한 상태에서 접종하도록 하는 게 의외의 사고를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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