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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마리오’의 100일 마법…'왕따' 이탈리아가 ‘모범국’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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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사진은 2019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시절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사진은 2019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시절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정치인 한 명이 국가 위상을 이렇게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탈리아 마리오 드라기 총리 얘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5일(현지시간) “지난 2년 동안 유럽연합(EU)의 왕따였던 이탈리아가 갑자기 EU의 모범국이 됐다”며 “모든 공은 드라기 총리에게 돌려야 한다”고 전했다. 드라기는 지난 2월 이탈리아 여야 모두의 지지를 받고 총리에 취임했다. 드라기는 이름을 게임 캐릭터에 빗댄 ‘슈퍼 마리오’로 유명하다.

지난해 경제성장률 -9% 최악 #드라기 총리 취임 석달도 안 돼 #298조원 경기 부양책 지휘 #프랑스·독일과 협력, 외교도 회복

드라기는 이탈리아의 사상 두 번째 비(非) 정치인 출신 총리로, 뼛속까지 정통 경제ㆍ금융 전문가다. 2011년부터 8년을 EU의 경제를 총괄하는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 역임하면서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EU 19개국) 경제위기 극복에 앞장섰다.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은 그를 “세계에서 2번째로 위대한 리더”라고 불렀다. 당시 그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유로화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약속을 지켰다. 이제 ‘슈퍼 마리오’의 미션은 ‘이탈리아 구하기’다.

지난 2월 이탈리아 전 총리 쥬세페 콘테가 마리오 드라기 총리에게 종(鐘)을 건네고 있다. 이탈리아 전임 총리가 신임 총리에게 종을 건네는 것은 이임의 전통 의례다. EPA=연합뉴스

지난 2월 이탈리아 전 총리 쥬세페 콘테가 마리오 드라기 총리에게 종(鐘)을 건네고 있다. 이탈리아 전임 총리가 신임 총리에게 종을 건네는 것은 이임의 전통 의례다. EPA=연합뉴스

2019년 ECB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자연인으로 돌아간 드라기를 국내 정치로 불러들인 건 다름 아닌 정치인들이다. 이탈리아 세르지오 마타렐라 현 대통령에게 “총리로 나서달라”라는 요청을 받고 수락했다. 이탈리아는 EU 회원국 사이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가 유독 컸다. 성 접대부터 뇌물까지 각종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2011년 사임한 이후 이탈리아 정계는 ‘잃어버린 10년’을 맞았다. 민주당(PD)ㆍ오성운동(M5S)부터 생동하는 이탈리아(IV) 등 각종 정당이 합종연횡을 거듭했으나 실정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이 나서서 드라기에게 SOS를 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텅 빈 로마의 트레비 분수. 지난 3월15일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코로나19로 인해 텅 빈 로마의 트레비 분수. 지난 3월15일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국내 정치뿐 아니라 외교 등 국제 관계도 헝클어졌다. 2년 전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노란 조끼 시위대로 몸살을 앓고 있었을 때, 이탈리아 당시 부총리는 노란 조끼 시위대와 만나 지지를 표명한 게 대표적이다. 프랑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엘리제궁의 이탈리아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는 후문이다. 동시에 이탈리아 당시 내무부 장관은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이자 마크롱 대통령의 정적(政敵) 마린 르펜과 찍은 셀피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했다. FT는 “당시 이탈리아 커리어 외교관들 사이에선 ‘본국 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데다, (정치인들이) 외교관들을 배제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전했다.

‘슈퍼 마리오’의 등장 이후 100일이 채 안 된 지금, 상황은 정반대다. FT는 “드라기가 총리에 취임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았는데 이탈리아는 다시 EU의 모범 국가로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있으며 (EU의 맹주 격인) 프랑스ㆍ독일과도 협력이 잘 되고 있다”고 평했다. 유럽외교위원회의 야나 풀리에린 선임 정책 펠로우는 FT에 “이탈리아는 항상 EU의 사춘기 비행청소년 같은 존재였는데 (드라기 총리 취임 후엔) EU의 모범국이 됐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코로나19 희생은 컸다. 사진은 지난 1월 코로나19로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비닐을 사이에 두고 상봉하는 장면. EPA=연합뉴스

이탈리아의 코로나19 희생은 컸다. 사진은 지난 1월 코로나19로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비닐을 사이에 두고 상봉하는 장면. EPA=연합뉴스

드라기 총리는 경제관료 출신답게 숫자로 승부한다. 지난 24~25일엔 밤샘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2026년까지 2215억 유로(약 298조원) 규모의 코로나19 회복 계획을 승인했다. 그가 이날 결재한 계획안은 316쪽에 달한다. 6대 추진 과제와 5대 개혁 과제를 소상히 담았다.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친환경 경제구조 전환엔 570억 유로, 디지털화 혁신엔 425억 듀로를 할당했고 교육에 319억 유로, 코로나19가 드러낸 보건 위기 대응엔 197억 유로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마이너스 9% 성장을 기록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 나락에 빠졌으나 이번 계획안을 통해 2026년엔 국내총생산(GDP) 기준 최소 3.6% 성장률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탈리아의 지난해 기준 GDP 규모는 1조 9000억 달러로, 세계 8위권이다.

드라기 총리의 등장은 팬데믹 터널의 끝에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류 역사상 팬데믹 위기가 끝날 즈음엔 국민이 정치에 대한 기대수준이 유독 높아지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5일 ‘역사가 팬데믹 이후 시기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사람들은 팬데믹 막판엔 소비를 늘리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무엇보다 (자국) 정치인에 대해 요구가 거세진다”고 전했다.

미국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재닛 옐런 현 의장과 드라기 총리가 2017년 담소를 나누는 모습. 드라기는 당시 유럽의 경제 수장인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다. [중앙포토]

미국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재닛 옐런 현 의장과 드라기 총리가 2017년 담소를 나누는 모습. 드라기는 당시 유럽의 경제 수장인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다. [중앙포토]

물론 드라기 총리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순 없다. 드라기 총리의 리더십 스타일도 만기친람이 아닌 팀플레이라고 한다. BBC는 지난 2월 그에 대한 인물 집중탐구 기사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유엔 전직 고위 관료 스타판 데 미스투라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마리오는 팀플레이어다. 축구 팀으로 친다면 가장 뛰어난 선수는 아니지만 훌륭한 선수였고 무엇보다 언제나 좋은 전략이 있었고 어디로 공을 차야할지 정확히 알았다.”

그런 드라기는 일찍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의 아들로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15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일찍 철이 들었다. 드라기 총리는 한 인터뷰에서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니 방학이었는데, 친구들은 다 놀러간 사이 나는 (장례식 관련) 서류와 계산서를 처리해야 했다”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을 여읜 슬픔을 생에 대한 의지로 승화했다. 학교에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경제학을 파고들었다.

BBC는 “트라우마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낸 드라기 총리는 뛰어난 집중력으로 유로존을 위기에서 구해냈다”며 “이제 그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전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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