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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의 블랙홀 된 암호화폐 시장…손놓은 당국에 규제 사각지대 속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암호화폐 시장이 블랙홀이 됐다. 자금과 투자자를 무섭게 빨아들이고 있다. 지난 2월 말 기준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소(빗썸, 업비트, 코빗, 코인원)의 실명확인 계좌 수는 250만1769개다. 같은 기간 투자자 예탁금은 4조6191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5배 늘었다. 업비트와 제휴한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에는 올해 1분기에만 180만개의 계좌가 신규개설됐다.

'코인 벼락거지'가 되지 않으려는 투자자의 행렬에 거래는 폭증하고 있다. 24일 하루 거래금액만 28조원에 달했다. 코스피 거래액(23일 기준 15조6533억원)을 넘어섰다. 코스닥(13조6727억원)까지 합한 거래액을 맞먹는다. 지난 1분기 4대 암호화폐 거래소의 거래금액은 1486조2770억원을 기록했다.

시장은 커졌지만 시장은 위태롭다. 투자자 보호는 요원하다. 법과 규정, 제도가 전무해서다. 과열 조장 우려에 당국이 손을 놓은 탓에 관리·감독은 동네 구멍가게 수준도 안 된다. 꼭 몸집만 훌쩍 커버린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듯하다. 인정할 수 없지만 방치할 수도 없는 '암호화폐 딜레마'다.

일 서울 강남구 빗썸 강남고객센터에서 한 직원이 시황판을 확인하고 있다. 뉴스1

일 서울 강남구 빗썸 강남고객센터에서 한 직원이 시황판을 확인하고 있다. 뉴스1

①투기과열 조장 우려에 사각지대 만든 당국

암호화폐와 관련된 법은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과 소득세법이 유일하다. 특금법은 자금세탁 방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소득세법은 가상자산 거래로 얻은 250만원을 넘는 수익에 대해 20%의 세금을 걷는 내용이다. 투자자 보호에 대한 법은 전무하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17년 암호화폐 거래소 인허가 제도 도입과 불공정거래 처벌 조항 등을 담은 관련 법안을 냈지만 별다른 논의 없이 폐지됐다. 당시에도 금융위는 “가상통화 거래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확대돼 오히려 투기과열이 조장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가 있다”며 해당 법안에 반대했다.

법과 규정이 없다 보니 암호화폐의 상장부터 거래까지 각 거래소가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코인을 만든 ‘코인 재단’이 거래소에 상장을 신청하면 거래소의 자체 심의위원회를 통해 상장 여부를 결정한다. 재단의 투명성, 기술력, 코인의 사업성 등을 확인한다.

업계 관계자는 “거래소도 나름의 검증을 거치지만 법에 따른 규제가 없는 데다 서류만으로 거르기 힘든 부분도 많다”며 “유사수신으로 처벌을 받았지만, 서류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자금만 대거나 하는 등으로 피해 나가면 거래소가 이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코인을 상장시킨 후 자전거래를 통해 가격을 상승시킨 후 대량의 시세차익을 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상장이 쉬운 만큼 상장 폐지도 빈번하다. 지난해만 해도 230개 암호화폐가 신규로 상장됐고 97개가 상장폐지됐다. 올해에도 2월 말까지 46개 코인이 신규로 거래되기 시작했고 10개 코인은 거래가 중단됐다. 거래 중단 여부도 거래소가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한 거래소에서 상장폐지된암호화폐가 다른 거래소에서 거래될 수 있다.

지난 3월 16일 투자유치 허위 공시로 국내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에서 상장폐지된 암호화폐 고머니2가 대표적인 예다. ‘5조원 규모의 초대형 북미 펀드인 셀시우스 네트워크’에서 투자를 유치했다는 공시가 올라온 뒤 가격은 배로 급등했다. 투자계약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해당 회사가 고머니2를 대량으로 사들였다며 캡처한 화면이 전부였다. 현재 다른 거래소에서 고머니2는 12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거래소마다 공시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법적인 규제는 없다. 공시한 후 가격이 오르는 ‘공시 호재’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검증은 전무한 수준이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암호화폐연구센터장)은 “해외에는 백서를 분석해 불량 코인을 걸러내는 커뮤니티가 활발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보니 불량 코인을 상장한 뒤 거액을 챙겨가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말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선서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선서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②거래소 폐업 경고에도, 정확한 숫자는 몰라

은 위원장은 지난 22일 “가상화폐 거래소가 200개가 있는데 등록이 안 되면 다 폐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시행된 특금법에 따라 암호화폐 거래소 등은 정보보호 관리체계와 실명 확인 입출금 계정 등의 요건을 갖춘 뒤 9월 24일까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해야 한다. 현재 요건을 갖춘 업체는 4곳(빗썸ㆍ업비트ㆍ코인원ㆍ코빗)뿐이다.

여러 업체가 실명계좌 개설을 타진하고 있지만, 시중은행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암호화폐 업계에서는 무더기 폐업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폐업 경고는 했지만 금융당국은 정확한 암호화폐 거래소의 숫자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은 위원장이 언급한 거래소 200곳도 민간 컨설팅 업체 등의 추산에 따른 것이다. 금융위가 추산한 거래소 숫자는 100~200곳 수준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그동안 법적 근거가 없었던데다 개폐업이 잦아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래소 숫자도 모르다 보니 정확한 투자자 수와 거래 규모 파악은 언감생심이다. 중소형 거래소가 폐업 시 발생할 투자자 피해 규모 추산도 불가능하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소장은 “정부가 지난 3년간 제도적 보완을 하겠다면서도 공식적인 통계 자료 등도 수집하지 않은 채 방치해왔다”며 “통계조차 없는데 어떻게 적절한 제도적 개선책을 낼 수 있겠냐”고 비판했다.

③차익거래 위한 무더기 환치기도 방관   

한국의 암호화폐 가격은 다른 나라보다 높다. 25일 기준 세계 1위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비트코인은 4만9706달러(5554만원)에 거래됐지만  국내 1위 거래소 업비트에서는 6109만원에 거래됐다. ‘김치 프리미엄(김프)’이다. 차익거래의 유인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해외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비트코인을 산 뒤 한국 거래소에 이를 옮겨 팔아도 얻을 수 있는 이익이 600만원 가량이다.

이른바 김치 프리미엄에 이익을 보는 건 중국의 암호화폐 투자자들이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13일 5대 시중은행(KB국민ㆍ신한ㆍ우리ㆍ하나ㆍ농협)에서 중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9759만7000달러(약 1090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월평균 중국 송금액(929만달러)의 10배가 넘는다. 반면 같은 기간 중국 외 국가로의 송금은 1억5428만달러로 오히려 43% 줄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중국 송금만 급증한 건 김치 프리미엄으로 본 이익을 보내는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며 "김치프리미엄이 줄어든 최근에는 송금도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암호화폐 환치기(불법 외환거래)로 수백억 원의 돈이 빠져나가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외국환거래법상 건당 5000달러 이하, 연간 5만 달러까지는 송금 사유 등을 밝히지 않고 증빙서류가 없어도 해외송금을 할 수 있다. 금감원은 시중은행에 내부 통제 강화를 당부했을 뿐이다. 은행들은 환치기로 의심되는 송금에 대해 거절하라는 지침만 내린 상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암호화폐에 대한 명확한 정의 등도 없어 외국환거래법상 송금 규모만 지킨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며 “최근에는 송금 관련 내역을 꼼꼼히 본다는 소문이 퍼져 '가족이 아프다' 등 송금 사유도 미리 준비해 오는 중국인들도 많다”고 말했다.

암호화폐의 제도화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보완책인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 교수는 “금융당국은 암호화폐를 금융자산으로 인정할 수 없어 주무부처가 되기를 꺼리고 있지만,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 소비자보호법 등 다른 법안을 적용하는 방법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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