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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인술 일깨워준 은혜 갚으러 갑니다"

중앙일보

입력

다음달 중순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놓은 치과의사 유양석(79)씨는 요즘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50여 년 만에 텍사스주의 샌 안토니오 육군군의학교와 워싱턴 DC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을 찾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입대한 군의관 1세대인 그는 종전 후 국군 군의관 중 최초로 미 국방부의 초청으로 이들 두 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사라진 군사원조 계획의 일환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치과 의학 수준이 아주 낮았어요.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뒤 곧바로 전선에 투입돼 포탄과 총알에 턱과 치아가 손상된 군인들을 무수히 치료했지만 의술의 한계를 절감했었죠. 미국에서 선진 치과 재료와 기술을 접하니까 비로소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습니다."

1954년(샌 앤토니오 군의학교)과 60년(월터리드 육군병원)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뒤 유씨는 68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후배들에게 선진 의술을 전수하는데 힘썼다.

"이번 여행은 감사의 마음을 뒤늦게라도 전하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나이가 많아 앞으론 먼 길 가기가 힘들지 않겠어요."

유씨는 이 같은 자신의 마음을 주한 미군 측에 전달했고, 얼마 전 미국 육군본부로부터 공식 초청장을 받았다. 그의 특별한 여행에는 현역 육군 치무병과장인 강동주 대령이 동행해 양국 치과 군의관 사이의 우의도 다질 예정이라고 한다.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서울 통의동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유씨는 63~68년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과 주치의를 지냈었다. 그의 진료실 벽엔 미국 군의학교와 육군병원의 교육 수료증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이 친필로 써준 전역 축하메모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그분과 저는 인연이 깊어요. 60년 미국에 다녀와 부산 5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시절 당시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박 전 대통령이 치료를 받으러 오셨죠."

유씨는 서울 수도육군병원에 근무할 때에도 수시로 대통령의 치아 건강을 챙겼다고 했다. 대통령이 돼서도 짜깁기한 바지를 입는 검소함, 치아본을 뜨려다 실수로 촛농을 혀에 떨어뜨렸는데도 화를 내지 않던 대범함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어찌됐든 사람이 도움 받은 건 잊지 말아야죠. 신세진 것을 갚음으로써 내 인생을 잘 마무리하려는 여행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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